[詩想과 세상] 첫눈
기자 2023. 11. 26. 20:31
오늘 밤에
정말이지, 앞이 캄캄한 밤에
첫눈이 찾아왔지
하늘에 모공(毛孔)이 있나 싶었지
실처럼
가느다란 빛처럼
흰 목소리
땅속에 파뿌리 내려가듯
내려오는 거였어
예전에 온 듯도 한데
누구이실까
손바닥에
손바닥에 가만히 앉히니
내 피에
뜨거운 내 피에 녹아
녹아서 사라진
얼굴
문태준(1970~)
첫눈이 왔다. 아직 가을을 다 보내지 못했는데, 겨울의 첫 마음이 불쑥 도착했다. 귀뚜라미도 제 울음을 못 그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눈이 펑펑 쏟아졌다. 거리의 은행나무들은 잎을 다 키우지 못한 채, 노란 은행잎 대신 초록 잎사귀들을 서둘러 떨궜다. 간간이 들려오는 이른 첫눈 소식들은 누가 보낸 다급한 전언일까.
첫눈이 내리면 누구나 봉숭아 물이 든 연인의 손톱처럼 설렌다. 첫눈은 혹독하고 매섭게 변할 겨울이 미안해하며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다. 시인은 첫눈에 대해 ‘가느다란 빛’이자 ‘흰 목소리’가 ‘땅속에 파뿌리 내려가듯’ 내려온다고 썼다. 하늘에서 땅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흰 빛이자 ‘흰 목소리’인 눈송이를 ‘손바닥에 가만히 앉히’면 녹아서 이내 사라지는 얼굴이 있다. 그 사라지는 ‘얼굴’ 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송이들을 보는 또 다른 눈송이들. 조금 일찍 온 눈송이들이 나중에 올 눈송이들을 기다리는 밤. ‘정말이지, 앞이 캄캄한 밤’이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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