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발언대] 보증금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시장이 최선일까
어렵게 행복주택에 당첨되었지만 포기한 사례들을 자주 듣는다.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수억원인 보증금 문턱을 넘지 못해서이다. 국민 절반의 연 소득이 3000만원 이하인 현실에서, 오로지 보증금만으로 수천만원을 부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입주를 포기한 사람들은 깊은 허탈감과 함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켜진다. 계약 기간 내내 월세를 미납하더라도 1000만원이 채 안 되는데, 공기업이 ‘보증금’을 높게 받을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보증금’이라는 단어 사용이 잘못되었다. 한국의 주택 임대차시장에서 보증금은 월세 체납의 충당을 위해 보관하는 용도가 아니다. 주택 공급을 위한 금융이 부실한 가운데 공급자들은 단기 차입에 가장 편리한 보증금 제도를 대안으로 활용하였다. 보증금으로 주택 공급 자금이 마련되니, 주택 공급 금융의 개발에도 무관심해지는 결과가 이어졌다. 아무도 보장하지 않는 개인 간 사적 대출이 대한민국 주택 공급 생태계의 근간이 된 것이다. 오죽하면 공기업이 공급하는 공공주택조차 입주자의 보증금을 통해 건설되고 있는 형국이다.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은 언제나 세입자의 몫이었다. 보증금이라는 사적 대출은 갭투기의 핵심 자원이 되었다. 불에 기름을 붓듯 정부는 수요자에게 대출을 장려했고, 더 많은 보증금이 시장에 쏟아진 결과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설상가상으로 불황이 시작되자 깡통전세라는 끔찍한 고통이 세입자에게 돌아왔다. 어디 그뿐일까. 주택 공급 금융이 후진적이니, 공급자들은 투기 수익에만 의존하는 부실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매몰되었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수많은 부동산 PF가 터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PF의 상당 부분을 가계부채가 감당하고 있으니,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갇힌 것이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빌린 돈을 평생 처음 본 임대인에게 그대로 넘겨주고, 임대인은 보증금으로 받은 돈을 그 집과 관련 없이 쓰고, 돈을 빌리라고 부추긴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책임자는 없고 돈은 어딘가로 증발하는 도박판이나 다름없다. 폭탄은 점점 커지지만, 누구도 다른 공급 모델을 상상하지 못한다. 주택 공급자가 보증금을 유용하거나 편취하였을 때의 페널티가 금융을 통해 공급하는 방법보다 불리했다면, 이미 다양한 모델이 실험·정착되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ECOPACK’ 프로그램을 통해 제로 에너지 빌딩을 시장에서 촉진하는 주택 공급 금융상품을 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후진적인 제도에 머물러 있다.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정부는 전세제도를 폐지한다는 정치적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보증금 이외의 방법으로 주택이 공급되는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좋은 집을 제대로 짓고 싶은 사람에게 제도의 틀 안에서 안전하게 돈을 빌려주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자산 약자들이 크게 피해를 보아야 끝나는 비극의 역사는 이젠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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