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현상
[서울 말고]
[서울 말고] 권영란 | 진주 ‘지역쓰담’ 대표
희한한 일이다. 이미 봤는데 또 보러 간다. 온 가족이, 더러는 3대가 모여 보러 간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적극 추천한다. 조민수, 김종수, 박혁권… 알만한 배우들이 관람 후 사비를 털어 상영관을 빌리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여기에다 전국 각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직능단체가 나서서 단체 관람을 한다. 지난 15일 전국 120여 영화관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현상이다.
김장하(79)는 경남 사천과 진주에서 60여 년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했다. 시골 한약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틈틈이 신문을 읽던 소년은 독학으로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해 한약방을 열었고 20대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혜택을 받은 학생이 1000명 이상이었다. 40살에는 명신고를 설립하고 48살에 학교를 반석에 올린 뒤 국가에 헌납했다. 또 지역언론(옛 ‘진주신문’)이 창간하자 “권력이 무서워할 게 있어야 한다”며 매달 1000만 원의 운영비를 10년여 지원하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문화연구소 등 지역내 민간단체와 인권, 문화예술, 학술연구, 환경 등 여러 분야에 기꺼이 도움을 줬다. 정작 자신은 낡은 양복에 뒤축이 닳은 구두를 신었고 여럿이 있어도 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어른 김장하’는 엠비시(MBC) 경남이 제작했다. 카메라는 김장하 선생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김주완(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기자의 뒤를 좇는다. 선생은 쉽사리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침묵한다. 영화는 선생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탐문하며 그들의 옛 기억과 구술을 조각조각 맞춰 선생의 서사를 더듬는다. 영화판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올해 초 설날 연휴 티브이에서 방영돼 많은 울림을 줬고 제59회 백상예술대상 티브이부문 교양작품상 등 여러 곳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지역 방송국이 이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니…”라며 상찬(?)을 보냈다.
김현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역 방송사 피디로서 지역성을 잘 구현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데 지역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지역 이야기를 바깥으로 알리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지역 이야기가 ‘지역을 넘어 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론이 앞장서서 ‘어른의 부재’를 말하지만 지역에는 ‘귀한 어른’이 곳곳에 있다. 김장하 선생처럼 특별한 어른도 있겠지만 타인에게 해 끼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귀한 어른이다. 이들 속에서 ‘평범하지만 특별한’ 삶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것은 서울수도권 언론이 할 수 없는, 지역 언론의 몫이라 하겠다.
희한한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진주를 방문하는 이들이 잇달았다. 삼삼오오 진주에 와서 폐업 후 셔터가 내려진 남성당한약방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가 하면 주변 자전거포, 식당을 기웃댔다. 대형버스를 대절해, 김주완 기자가 쓴 책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를 들고 ‘김장하 루트’를 탐방하는 단체도 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선생의 말을 되뇌며 좀 더 좋은 어른을 꿈꾸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걸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 김장하’에 스며드는 중이다.
지난 22일에는 경남 사천에서 김장하 선생의 고향인 정동면 주민들의 단체 관람이 있었다. 지역 언론사인 ‘뉴스사천’과 정동면 행정복지센터가 공동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처음으로 영화관에 왔다는 여든, 아흔을 바라보는 주민들은 김장하 선생과 한 동네 살던 시절을 얘기하며 “그리 마이 벌어 좋은 데 다 썼네”, “내가 부끄럽네”, “고향에도 일을 마이 했는데 이리 애쓴 줄은 몰랐다”고 한마디씩 했다. 표정이 환했다. 장한 것을 장하다 여기는 어른들이었다.
정작 선생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 제작진이 조심스레 초대한 시사회 참석도 거부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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