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48]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끼리도 ‘차별’은 있었습니다. 남루한 인생이었지만 자신보다 안 된 처지인 사람을 깔보고 학대합니다. 하류인생이라고 모두가 같은 ‘급’은 아니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 공간인 나치 강제수용소에서도 그랬습니다.
정치범, 외국인 포로, 성범죄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가장 심한 학대를 당한 건 유대인이었습니다. 나치가 조직적인 유대혐오 정서를 퍼트려서였지요. 여기 유대인만큼이나 혐오받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동성애자’였습니다.
게이에 대한 차별을 묘사한 오스트리아 화가 마티아스 로렌츠 그라프의 2017년 작품.
나치는 동성애자를 강제 수용소로 몰아넣었습니다. 우월한 독일 민족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강제 노동, 채찍질, 말뚝에 매다는 고문을 가했지요. 이들을 감독하는 수감자인 카포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남자끼리 하는 거 좋아하잖아”라는 모멸 섞인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동성애자였던 이들은 누겹의 차별을 겪어야 했었지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동성애 학살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홀로코스트’에 빗대어 ‘호모코스트’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은 과거사 대처의 모범국으로 통하지만 모든 피해자에게 공평한 건 아니었습니다. 피해 동성애자들이 보상받았을 때는 불과 6년 전, 2017년이었습니다. 나치 집권(1933년) 80년이 훌쩍 지난 후였지요. 힘 있고 돈 있는 존재 유대인에게 했던 처사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나치와 동성애를 생각합니다. 더불어 국제정치의 냉정함과 선진국인 독일의 이면을 사유하는 시간입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동성애를 혐오한 나치즘
“동성애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우리의 적이다.”
1928년 나치당이 내건 구호였습니다. 문장에부터 벌써 성소수자 혐오 정서가 풍겨오지요. 무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독일 게르만족이야말로 위대한 아리아 인종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민족”이라는 인종주의적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서 불온서적을 태우는 나치. 그들은 문화적 관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치의 지상 과제는 순수한 독일 민족의 아이가 되도록 많이 태어나는 것이었지요. 동성애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지 않은 ‘반애국적’ 인물들로 몰린 배경입니다. 일부 나치 정치인들은 “동성애가 독일 국민을 훼손하려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기도 했었지요.
동성애 처벌의 원조는 ‘군대국가’ 프로이센
나치가 동성애자를 처벌하기 시작한 최초의 정치집단은 아니었습니다. 남성간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한 최초의 근대국가는 프로이센 왕국이어서입니다. 1871년 프로이센이 제정한 악명높은 형법 ‘175항’이었습니다. 군국주의의 대명사였던 프로이센 또한 ‘남성성’을 강조했기에 동성애를 탄압하는 법 조항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위대한 프로이센인, 동성애는 있을 수 없다네.” 베르사유 거울의 방 에서 빌헬름 1세 를 독일 황제로 선포하는 모습을 묘사한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 의 작품 . 가운데 흰색 군복을 입은 비스마르크가 눈에 띈다.
‘국가의 모습을 한 군대’인 프로이센이었지만 동성애로 처벌받는 이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동성애자가 적어서만은 아니었지요. 독일의 의사들이나 성학자 등 저명한 인사들이 해당 법을 전면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97년 창립된 과학인도주의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ares Komitee)는 “성적 지향은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75항에 전면적인 반대 목소리를 냈었지요. 같은 해 폐지에 청원하는 서명도 6000명에 달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동성애 권리 단체가 생긴 것도 프로이센에서였습니다.
1942년 나치 선전 포스터. “독일군이 단결하면 지옥에서 악마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말을 인용한 문구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대중들은 동성애를 처벌해야 할 행위로 봤습니다. 위정자들은 보수적인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지요. 실질적으로 법 적용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에도, 처벌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1909년에는 175항에 여성끼리의 성관계도 처벌하는 문구를 삽입합니다.
성 소수자의 성지로 떠오른 바이마르 공화국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독일만큼 잘 들어맞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모든 것이 암울하던 그때 새로운 창조성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1918년 11월 설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습니다.
패전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긴장, 갈등, 불안과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예술의 자양분이 됐습니다. 문학·미술·건축·음악·영화 모든 분야에서 성취가 있었지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베를린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았습니다. 정치 이론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바이마르 문화를 고대 아테네 황금기에 빗대어 ‘페리클레스 시대 로 묘사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발행된 세계 최초 게이잡지 Der Eigene 표지.
봇물 터지듯 샘 솟는 문화 예술의 향연 속에 개방적 성문화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베를린 사람들에게 성관계는 자유와 진배없었습니다. 사랑한다면 성별을 개의치 않았지요. 도시에 성 상담소가 19개가 성업일 정도로 성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과학연구소와 성박물관이 세계 최초로 문을 연 것 역시 베를린에서였습니다. 1923년에는 남성을 여성으로 바꿔 놓는 성전환수술도 진행됐지요. 물론 이 역시 세계 최초였습니다. 이제 베를린은 군국주의 프로이센의 심장에서, 성(性)의 수도가 되었지요. 물론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인간의 타락”을 의미했을지라도요.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셀레베스(Celebes). 1920년대 독일 문화적 다양성의 상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치즘의 등장으로 시작된 동성애자 수난시대
빛이 강한 곳엔 어둠도 짙어지기 마련입니다. 바이마르의 개방성은 역설적으로 반대 세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고 있었습니다. ‘나치’의 등장이었습니다. 나치는 175항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게이클럽에는 하루가 멀다고 경찰이 들이닥쳤고, 성 연구소 역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지요. 뮌스터의 추기경인 클레멘스 폰 갈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부도덕에 대한 공개적 선전”이라고요.
그들이 집권한 1933년부터 패망한 1945년까지 약 10만명의 남성이 동성애 혐의로 체포됐을 정도입니다. 성 연구 서적 1만 2000권이 ’분서갱유‘를 당했습니다.
독일의 유명 게이클럽인 ‘엘도라도’. 1932년 촬영된 사진.
수많은 동성애자는 자기 고향 땅에서 실향민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베를린은 더 이상 자유롭던 그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치와 그의 추종자들이 뿜어내는 혐오에 베를린은 초토가 되었습니다. ‘마의 산‘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이 독일을 떠난 것도 이때였지요. 그 역시 동성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망명한 영국에서 BBC를 통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히틀러를 비난합니다.
나치가 독일 성연구소를 습격해 성 관련 도서를 검열하고 있다. 1933년 촬영된 사진.
‘마의 산’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은 동성애 성향으로 처벌받을까 두려워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했다.
강제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들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이들은 약 32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던 적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약 8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강제 거세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성이길 포기한 존재들이니 직접 남성성을 제거해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나치는 여러 색으로 수용소 내 수감자들을 구별했다. 여기서 가장 최악의 대우를 받은 이들이 노란색의 유대인과 핑크색의 동성애자였다.
수용소에서도 그들은 유대인과 함께 최악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노란색 별로 식별된 것처럼, 동성애자들은 분홍색 역삼각형으로 구별 지어졌습니다. 성소수자 혐오자들은 이 마크를 보고, 동성애자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지요. 교도관과 동료 수감자로부터 오는 이중의 고통이었습니다.
일부는 주기적인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미국 역사학자 클레이튼 휘스넌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들은 인간이 견뎌야 했던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다.”
삼각 뱃지를 단 수용소 수감자들.
2차세계대전은 끝났지만...수용소의 비극은 계속
나치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비극은 계속됩니다. 여전히 형법 175항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7년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는 175항은 합헌으로 결정했습니다. 이 법은 1969년까지 지속됐지요. 1945년부터 1969년까지 서독에서 동성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5만명에 달합니다. 나치 통치 12년 동안 유죄판결을 내린 사람 수와 같았습니다. 핑크색 역삼각형의 주홍글씨가 종전 이후에도 계속된 셈입니다.
175항 타도 포스터. 1970년대 작품.
수용소 수감자들은 전후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동성애자들은 예외였습니다. 범죄자로 분류되는 게이 남성들은 배상금과 국가연금이 거부됐지요. 정치범과 유대인 피해자로 확인된 사람들조차 추후에 동성애자임이 밝혀지면 자격이 박탈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동독 판사가 동성애 피해자에게 연금 지급을 반려한 것을 증명하는 서류
동성애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시계는 더디게 흘렀습니다. 1985년 나치 동성애자 박해 사실을 서독 대통령 리처드 폰 바이츠제커가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사실상 사문화된 175항이 폐지된 건 1994년이 되어서였습니다. 2002년 독일은 175항에 따른 나치의 판결을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15년 뒤인 2017년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주어지지요. 늦었지만 제대로 된 한 걸음이었습니다.
2017년 공개된 베를린 최초의 동성애 해방 운동 기념관. <저작권자=Alorin>
핑크색 역삼각형의 의미
현재도 수많은 성소수자 활동가가 있습니다. 이들은 역삼각형 핑크색 배지를 달고 활동합니다. 나치가 찍은 낙인은 이제 그들에겐 저항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을 사랑하고, 증오를 증오하라”고. 비정상인 건 어쩌면 사랑을 증오하는 그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드니 게이 홀로코스트 기념비. 핑크색 역삼각형이 그 상징이다. <저작권자=Koala Bear>
시민단체 액트업은 분홍색 삼각형을 차용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네줄요약>
ㅇ나치가 학살한 건 유대인뿐이 아니었다. 동성애자도 그 표적이었다.
ㅇ집단 수용소에서 죽은 동성애자는 3200명에 달한다. ’호모코스트‘라고 불리는 이유다.
ㅇ동성애자들은 전후에도 피해자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여전히 형법상 동성애가 범죄였기 때문이다.
ㅇ2017년이 되어서야 그들은 피해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게이의 수난사였다.
<참고 문헌>
ㅇ김학이, 나치즘과 동성애, 문학과지성사, 2013년.
ㅇ조일구, 나치독일의 남성성 담론과 동성애, 한양대학교, 2004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