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이 원래는 강북이었다고?…그 큰 땅을 어떻게 강남으로 옮겼나 [서울지리지]
과거 홍수 영향으로 한강은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잠실은 특히 변동이 심했다. 사실 잠실은 조선 전기만 해도 왕실목장이 있던 살곶이벌(성동구 자양동 뚝섬)에 있었다. 강남권이 아니라 강북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 15년(1520) 대홍수로 뚝섬을 가로질러 샛강이 생기면서 잠실 일대는 섬으로 분리됐다. 원래 한강 본류는 잠실섬 남쪽을 지나던 ‘송파강’(松坡江)이었다. 대홍수로 만들어진 북쪽의 샛강은 새로운 강이라고 해서 ‘신천’(新川)이라 불렸다.
1971년 ‘한강개발 3개년계획’의 일환으로 부리도·잠실섬을 삼전·석촌·송파와 연결해 육지화하고 일대 1124만㎡(약 340만평)에 잠실아파트 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짓는 사업이 추진됐다.
조선의 한강은 전국의 모든 물화가 집하됐다가 다시 전국으로 분산되는 해운의 중심지였다. 19세기초 전국에서 곡식이나 생선을 싣고 한강에 모여드는 상선의 수는 한해 1만 척 이상이었다.
강에는 포구들이 빽빽했다. 한강진(한남동)은 경기 광주로 가는 길목의 나루터로 한양의 물화가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노량진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가 놓였던 곳이다. 노량진의 드넓은 백사장에서는 1만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 군사훈련과 사열을 했다.
용산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한강 포구에서 고개를 넘지 않고 도성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였다. 용산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여러 곳 있었으며 배로 운송된 하역물품을 창고까지 운송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포는 서해의 어물이 많이 몰려와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해산물이 집하됐다. 밀물 때가 되면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마포 부근까지 들어차면서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가 다른 포구보다 유리했다.
서강은 용산과 더불어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의 세곡선이 모였다. 서강포구에는 공세청(세금징수 관청), 점검청(공미검사 관청), 광흥창(관료녹봉 보관창고) 등이 있었다.
뚝섬은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목재의 집산지로 한양 최대 목재시장이었다. 500여호에 달하는 뚝섬 주민 대다수는 목재와 땔나무 상인이었으며 짐꾼, 마부, 국수장수, 주막주인 등이 이들을 상대로 먹고 살았다. 이들은 연대의식이 강해 집단행동을 하기도 했다. 1851년(철종 2) 뚝섬 거주민 수백 명과 포교가 충돌한 사례가 있다.
송파진의 장시였던 송파장은 18세기 후반 시전상업 체제를 위협하는 유통거점으로 부상했다. 송파장은 광주부 소속으로, 한성부의 금난전권(상업독점권)이 미치지 않아 일반 상인들도 자유롭게 영업했다. 삼밭나루인 삼전도(송파구 삼전동)에서는 게가 많이 잡혀 해마다 5000마리를 진상했다.
얼음창고인 빙고도 한강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빙고는 서빙고, 동빙고, 궁궐 안의 내빙고 두 곳 등 총 4곳이었다. 동빙고는 두모포(동호대교 북단의 포구), 서빙고는 용산구 둔지산 자락에 설치됐다. 서빙고는 왕실과 문무백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의금부·전옥서 죄수들에게까지 나눠줄 얼음을 보관해 동빙고에 비해 규모가 12배나 컸다.
한강에는 명승도 허다했다. 강을 따라 권세가들의 별장이 줄지어 들어섰다. 조선후기 문신 엄경수(1672~1718)의 <연강정사기>는 한강의 누각과 정자를 종합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1716년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오르며 강안에 자리한 누정을 순서대로 설명하면서 감상을 적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누정은 총 29개다. 그중 하나가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이다.
반면, 예전의 한강은 지금보다 수심이 낮았고 모래톱이 강변에 어지럽게 형성돼 있어 불편도 컸다. 한강으로 무수한 배가 드나들었지만 서해 밀물이 들어와야 원할한 교통이 가능했다. 강바닥이 높아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기 일쑤였다. 조선 22대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준설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강이 예전에 비해 점차 얕아지고 있다. 조운선이 여울을 만나면 반드시 밀물을 기다렸다가 올라가니 만약 한번 쳐낸다면 어찌 백세토록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일성록(규장각 학자들이 정조의 언행을 수록한 수상록)>
환경단체는 수질개선과 자연성 회복을 위해 신곡수중보 개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강이 가진 매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화시대의 정비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과거의 완전한 회복으로 인한 부작용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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