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불패, 다시 시작될까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최근 MBC 《연인》이 시청률과 화제성을 모두 거머쥐며 화려하게 종영했다. KBS는 《고려거란전쟁》으로 대하사극 부활을 알렸다. 이처럼 사극이 최근 시청률 부진으로 고민하는 지상파 방송사들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사극들은 어떻게 지상파를 외면했던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걸까.
MBC 사극 《연인》의 최고시청률은 12.9%(닐슨코리아)다. 과거 지상파 전성시대의 사극들이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소소한 편이지만, 달라진 매체 환경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떨어진 시청률을 감안하면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무엇보다 화제성은 최고였다. TV 화제성 분석 기관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의 화제성 순위에 따르면 《연인》은 드라마·OTT 통합 화제성 1위, 드라마·비드라마 전체 프로그램 화제성 1위를 차지했다. 또 드라마 출연자 화제성에서도 《연인》의 주연 배우 남궁민과 안은진은 나란히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보기 드문 연장방송(1회 연장)까지 하게 됐고, 심지어 시청자들도 이를 반기는 이런 광경은 그래서 참 오랜만이다. 지상파 드라마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나 나오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지상파가 꺼내든 최종병기, 사극
KBS도 사극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11월11일부터 첫 전파를 탔다. 첫 회 시청률은 5.5%였지만 조금씩 서사가 본격화되면서 4회에는 7%까지 올랐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26년간의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에, 현종(김동준)과 강감찬(최수종), 양규(지승현) 등 역사가 기록한 영웅들의 서사가 더해졌다. 그간 제작비 등의 문제로 멈춰서 있던 KBS 대하사극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다. 물론 최근의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과 비교해 보면 어딘가 옛 감성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대하사극에 익숙한 KBS의 고정 시청층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작품이다.
《고려거란전쟁》이 정통사극에 가까운 대하사극이라면, KBS가 월화드라마로 내놓은 《혼례대첩》은 조선이라는 배경을 쓰고는 있지만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고 그 서사 역시 장르물에 가까운 퓨전사극이다. 임금(조한철)조차 코믹하게 그려지는 이 작품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당대의 돌싱이라고 할 수 있는 원녀(과부), 광부(홀아비)들을 중매해 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코믹멜로지만, 이 중매를 둘러싸고 있는 임금과 역적 모의를 하는 세력 간의 정치적 다툼 또한 들어있는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풀어낸 허구지만, 연등회 같은 당대 풍속을 들여다보는 맛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KBS는 《고려거란전쟁》과 《혼례대첩》으로 정통과 퓨전을 오가는 사극 레시피를 꺼내놓은 셈이다.
최근 지상파 사극이 특히 주목받는 건, 상대적으로 현대물들이 타 채널이나 OTT와의 경쟁에서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서다. 그러다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바로 2021년 말에 방영됐던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이었다. 이 작품은 17부작으로 17.4%의 높은 시청률로 종영했다. 당시 이 작품은 이산(이준호) 정조와 훗날 의빈 성씨가 되는 성덕임(이세영)의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얹었다. 궁녀라는 직업적 관점으로 당대의 역사를 들여다봤고, 그것이 현재적으로는 주체적인 여성 서사와 공감대를 이루면서 큰 반향을 얻었다.
《연인》 역시 이러한 역사와 허구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소현세자(김무준)의 안타까운 비극적 역사를 가져와 그 위에 허구적 인물 이장현(남궁민)과 유길채(안은진)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물론 그 멜로에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현재적인 질문 또한 빼놓지 않았다. 특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왔지만 아버지 인조(김종태)의 의심과 불안에 의해 끝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독살설로 그려진) 소현세자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노예로 끌려갔다 돌아와서도 '환향녀'라는 주홍글씨로 돌팔매를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동일선상에 그려낸 건 독창적이었다. 이런 지점이 아는 역사지만 현재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줌으로써 시청자들의 반향을 이끌어낸 이유였다.
최근 사극들은 정통에서 퓨전, 심지어 판타지까지 장르가 다양해졌다. KBS 대하사극이 이끌어왔던 정통 사극은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좀 더 과감한 상상력이 더해진 퓨전사극으로 《슈룹》이나 《연모》 같은 작품들은 꾸준히 등장했다. 나아가 《홍천기》나 《환혼》 같은 판타지 사극도 시도됐다. 그 역사의 폭도 조선시대를 여전히 중심으로 삼고는 있지만 고려시대를 가져온 《고려거란전쟁》이나 심지어 선사시대를 가져온 《아스달 연대기》 《아라문의 검》처럼 점점 넓어지고 있다. 즉 상상의 영역이 훨씬 폭넓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의 무한 확장이 사극의 대중적 성공을 담보한 건 아니다. 오히려 사극이 지나치게 허구 쪽으로 흘러가면서 사극 본연의 힘은 역사라는, 실제 벌어졌던 사실에서 나온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결국 《옷소매 붉은 끝동》이나 《연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역사와 허구 사이에서 균형 있는 접근을 해준 덕분이다. 예를 들어 《연인》을 잘 들여다보면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소현세자나 인조, 최명길, 김상헌 같은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배경 위에 서있는 이장현이나 유길채 같은 인물은 현재적인 인물에 가깝다. 충효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백성 버리고 도망친 임금보다 내 옆에 있는 내 님과 이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마치 이들은 현재의 인물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간 것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 역사와 허구, 과거와 현재 사이의 긴장감과 균형이 이 사극에 대중이 열광한 주요인이다.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해진 사극
사극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드라마로 재구성된 역사라는 점에서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다. 즉 지금 현재 왜 그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가져오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대중이 갖고 있는 욕망이나 갈증 같은 것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연인》이 성공한 건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 속에서 끝내 버티고 살아남은 민초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자가 이끄는 나라가 아닌 민초들이 버텨낸 나라라는 다분히 현재적인 관점을 담고 있어서다. 이것은 지금의 대중이 갖는 민심이기도 하다. 정치인 같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들이 끊임없이 국민을 호명하지만, 정작 국민은 들러리가 돼버리는 현실 속에서 《연인》의 이런 관점은 커다란 공감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돌덩어리, 풀때기처럼 삽시다. 하찮게. 시시하게. 우리 둘이." 이장현이 유길채에게 하는 그 말은 그래서 그저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닌 지금의 대중이 그 시시한 삶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말처럼 들린다.
심지어 《아라문의 검》처럼 역사가 시작되기 전 문명의 탄생을 그리는 사극에서조차 지금의 관점들이 투영된다. 문명을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수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문명에 의해 자연적 제약을 넘어 인류가 발전했지만 그 결과, 현재 우리가 마주한 전 지구적 위기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퓨전사극으로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혼례대첩》도 마찬가지다. 코믹멜로를 지향하는 다소 발랄하고 가벼운 작품이지만, 《혼례대첩》은 현재의 이야기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법한 스토리를 역시 발랄한 현재적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원녀들의 짝을 지어주기 위해 연등 축제에 모인 광부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광부1호' '광부2호'로 그들이 지칭되는 장면은 여러모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짝》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드라마 매회 시작 부분에 인물들이 화면을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인터뷰식으로 담는 연출 또한 현대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방식 그대로다. 즉 《혼례대첩》은 배경을 조선시대로 가져와 그 시대의 풍속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현재의 서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K드라마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러면서 제작 투자도 더 많아지면서 사극의 완성도 또한 상당히 달라졌다. 《고려거란전쟁》의 경우 총제작비가 약 270억원으로 첫 회에 슬쩍 등장한 거란과의 전쟁신은 지금껏 KBS 대하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스케일과 완성도였다. 수만 군사가 검차를 끌고 말을 몰며 부딪치고 싸우는 거대 스펙터클이 연출된 것. 제목부터 '전쟁'을 내세운 데다, 실제 역사가 말해 주는 '귀주대첩' '삼수채 전투' '흥화진 전투'까지 《고려거란전쟁》은 이러한 완성도가 담보되지 못하면 실현되기 어려운 작품이다.
과거 KBS 대하사극의 경우 이러한 전투신들이 다소 소박하게 그려지기 마련이었다. 전쟁 장면 대신 장수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전투 상황을 설명하는 연출도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수준 높은 영상들을 경험한 시청자들이 이를 용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작품을 전우성 감독과 공동 연출한 김한솔 감독은 러닝타임만 30분에 달하는 귀주대첩의 CG에 역대 최대 제작비를 들였다고 밝혔다. KBS 수원 드라마세트장에 대형 야외 크로마 세트장을 만들어 찍은 후, '디지털 크라우드'라는 CG 인간들을 대규모 합성해 완성했다는 것이다.
《혼례대첩》은 가볍고 발랄한 서사를 꾹꾹 눌러주는 심도 있는 세트와 조명은 물론이고 색색의 의상들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고풍스러운 가옥들과 호수를 배경으로 연등이 아름답게 펼쳐진 밤 풍경에 저마다 등 하나씩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벌이는 장면은 그 색감이나 조명이 색색의 한복과 어울려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최근 들어 K콘텐츠의 글로벌 인기로 인해 해외에서도 한복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요즘, 이 작품의 공들인 미술과 의상은 해외 팬들의 눈도 즐겁게 할 것으로 보인다.
고증부터 미술까지 때깔 달라진 사극
우리네 드라마에서 사극은 다른 장르들에 비해 본래부터 극성이 강했다. 전통적인 드라마로 흘러왔던 가족드라마, 멜로드라마와 달리 갈등의 결과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극의 특성 때문이다. 가족 간의 갈등이나 남녀 간 갈등보다, 역사 속 전쟁이 더 시선을 잡아끄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물들도 범죄스릴러 같은 수위 높은 장르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사극은 그 본태적인 극성만으로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상상력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판타지까지 흘러갔던 사극이지만, 그것 역시 답은 아니었다. 결국 다시 사극이 돌아오고 있는 건 역사다. 물론 그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현재적 관점이 더 중요해졌지만 말이다.
타 장르들이 힘을 못 쓰는 지상파에서 사극은 대안적인 구원자로 등장했다. 사극 제작의 노하우 역시 지상파들이 축적해온 게 더 많은 데다, 무엇보다 충성도 높은 사극 애호가들이 고정 시청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극 대열에 타 채널과 OTT도 합류할 예정이다. ENA가 《낮에 뜨는 달》을 방영하고 있고, 티빙은 《우씨왕후》 《원경》 같은 사극을 선보일 예정이다. 과연 다시 사극 불패가 시작될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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