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셔! 진짜 못 먹겠다”…‘겉절이’ 담그듯 만드는 와인, 맛 어떨까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11. 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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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1월 셋째주 목요일이면 어느 편의점에 가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레드 와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날이기도 하죠. 바로 프랑스산 햇와인, 보졸레 누보(Beaujolais Nuovo)의 매년 출시일 입니다.

사실 보졸레 누보는 1950년대까지 선술집에서나 소비되는 값싼 와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탁월하고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1980년대엔 샴페인과 더불어 전세계 축제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보졸레 누보의 마케팅은 현재도 종종 대학교 마케팅 전공 수업에서도 사례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누군가는 ‘가장 빠른 와인’이라며 환호하지만, 누군가는 ‘가장 사기적인 와인’이라고 조롱하는 보졸레 누보의 속사정을 파헤쳐 봅니다.

보졸레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는 가메(Gamay) 품종.
보졸레 누보, 어쩌다 만들게 됐나
프랑스어로 누보는 영어로 뉴(New) 입니다. 직역하자면 ‘새로운 보졸레’라는 뜻인데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의 보졸레(Beaujolais)와 보졸레 빌리지(Beaujolais Village) 지역에서 재배된 가메(Gamay) 품종 포도로 만든 과일향이 나는 레드 와인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겉보기엔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보졸레 누보, 왜 만들어졌을까요?

과거 유리병이 보편적이지 않고 지금처럼 보존 기술도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와인을 커다란 오크통째 구매해 지하 같은 서늘한 곳에 가져다 놓고 필요할 때마다 덜어 마셨습니다.

문제는 오크통 속 와인이 줄어들수록 와인과 공기의 접촉면이 늘어나 산화가 급속도로 촉진된다는 점 입니다. 날이 더운 여름엔 당연히 더 심해졌겠죠. 한여름, 묻어놓은 장독에서 꺼낸 신 김치를 떠올리면 적절할까요. 결국 여름 무렵 와인은 시큼한 맛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사람들이 시어진 와인 대신 신선하고 맛 좋은 와인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은, 개봉하지 않고 저장해둔 새 오크통을 개봉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서민에게 와인이 시큼하다고 새 오크통을 구입할만한 재력이 주어지진 않았죠. 여름 동안 시큼한 와인을 마시면서 포도 열매가 빨리 익기를 기다릴수밖에요.

부르고뉴 지방 남쪽에 자리한 보졸레 지역. [그래픽=winefolly]
신 와인은 이제 그만! 와인도 바로 마실래
그러나 가을이 오고 포도를 수확했다고 해서 바로 마실 수 있는 새 와인이 뚝딱 양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이니까요. 특히 레드 와인은 껍질과 씨앗에서 나온 특유의 떫은 맛, 탄닌(Tannin) 때문에 대부분 숙성을 거쳐야 했습니다. 결국 수확을 하고도 겨울까지 수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이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탄생한 게 바로 보졸레 누보 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신 김치를 활용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김치찌개와 묵은지찜 등이 탄생했다면, 프랑스인들은 아예 신 와인을 못견디겠으니 빨리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김장날 수육과 함께 바로 먹을 수 있도록 간편하게 절여낸 김치, 겉절이를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수월할 겁니다.

누보의 특별한 점은, 다른 와인과 다르게 포도를 으깨지 않고 송이째 발효하는 양조법에 있습니다. 이런 양조 방식을 탄산침용(Carbonic Maceration)이라고 합니다. 단순화하면 포도를 송이째 발효통에 넣고 통을 폐쇄해 발효시키면 포도알 안에서부터 과즙이 자연적으로 발효를 시작하고, 산소 없이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탄닌이 거의 없는 와인이 탄생하는 겁니다.

와인 자체는 단순하다고 평가됩니다. 묵직하고 진한 색의 일반 레드 와인 대신 포도, 라즈베리, 크랜베리, 설탕에 절인 과일(봉봉), 무화과, 바나나, 풍선껌 등 가볍고 과일향이 인상적인 상큼한 풍미의 와인이 되죠. 하지만 누보는 특징적인 풍미 대신 장기 숙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닙니다.

탄산침용되는 포도의 모습. 탄산침용은 포도의 붉은과실 풍미를 극대화 시켜준다.
보졸레 누보의 마케팅 전략
보졸레 지역에서 누보를 만든 것은 19세기 무렵부터 입니다. 시작은 상술했듯 지역의 가난한 농부들이 빨리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찾으면서였지만, 점차 ‘겨울이 오기 전에도 새 와인을 맛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프랑스 전역으로 소문이 퍼져 나갑니다. 소문과 비례해 주문도 밀려들어오죠.

밀려드는 주문은 일확천금을 꿈꾸게 합니다. 하지만 그냥 주문이 들어온다고 무작정 생산량만 늘렸다면, 지금의 보졸레 누보는 없었을 겁니다. 보졸레 지역 외 다른 생산지에서도 탄산침용을 활용한 양조가 성행하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밀렸을 수도 있고,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저급 와인으로 낙인 찍혀버렸을 수도 있죠.

바로 여기서 보졸레 누보의 유통 판매 마케팅 전략이 나옵니다. 우선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격을 일반 와인에 비해 저렴하게 유지합니다. 초창기에야 인지도가 일반 와인에 비해 떨어졌으니 당연한 가격입니다만, 전세계에 잘 알려진 현재에도 현지 출하 가격은 여전히 5~10유로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생산자들끼리 주문 물량을 더 많이 확보하고자 하는 과도한 경쟁을 막기 위해, 보졸레 누보의 출시일을 매년 11월15일로 통일한 것도 중요한 전략입니다. 이는 1985년부터 주말을 끼고 판매할 경우 이익이 더 많다는 판단 아래 11월 셋째주 목요일로 고정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보졸레 누보가 도착했습니다!(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보졸레 누보를 세계적인 와인으로 만든 마케팅 문구다.
누가 먼저 도착하나? 본능을 자극한 이벤트
두번째 마케팅 전략은 이벤트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벤트를 좋아합니다. 이벤트를 통해 파생되는 가십(gossip·소문)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죠. 이런 대중의 습성을 정확히 간파한 양조자, 조르주 뒤뵈프(Georges Duboeuf)가 재밌는 이벤트를 만듭니다. 바로 보졸레 누보 경주 입니다.

보졸레의 양조자인 조르주 뒤뵈프는 파리에서까지 누보를 찾게되자 보졸레에서 파리까지 와인 배송 경쟁을 붙입니다. 가장 먼저, 맨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향한 인류의 오랜 본능에 불을 당긴 셈이죠.

결국 처음엔 유통업자와 그들을 고용한 파리의 부자들 간의 배송 경쟁으로 시작했지만, 곧 보졸레 마라톤, 보졸레 하이킹 등 여러 파생 이벤트가 생기고 다른 양조자들도 합류하면서 하나의 축제로 자리잡게 됩니다.

대부분 나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유럽의 지형도 이벤트의 흥행에 도움을 줍니다. 인기와 트렌드가 프랑스를 넘어 유럽으로 퍼지자, 유사한 경주가 1980년대에 이웃 유럽 국가에서 나타났습니다. 1990년대에는 북미와 아시아에서 이어지면서 매년 11월 셋째주 목요일 보졸레 지역 양조장의 누보 출하는 국가적인 연례 행사가 됩니다.

보졸레 누보의 인기가 절정이던 시절, 주요 호텔들은 매년 11월 셋째주 목요일 저녁 주요 고객들을 초청해 보졸레 누보 파티를 벌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량을 먼저 확보하느냐의 이벤트 하나로 누구나 보졸레 누보를 찾고, 마시게 만든 겁니다. 현재는 보졸레(Beaujolais)의 이름을 딴 보쥬(Beaujeu) 마을에서 5일간 ‘Les Sarmentelles’라는 축제를 엽니다.

뒤뵈프는 이 밖에도 잘 알려진 마케팅 문구인 ‘보졸레 누보가 도착했습니다!’를 처음 사용하거나, 다소 무겁고 클래식한 와인 라벨에 팝아트를 결합시키는 등 보졸레 누보 와인의 마케팅에 큰 족적을 남겨 보졸레 와인의 교황으로 불립니다.

조르주 뒤뵈프의 생전 모습. 뒤뵈프는 보졸레 와인의 교황으로 불린다.
겉절이와 김장김치, 둘 다 맛있다
보졸레 누보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보졸레 누보가 ‘사기 와인’으로 찍히면서 입니다. 단순한 저급 와인이 마케팅으로 과도한 인기를 얻었다는 비난이죠. 단숨에 추락한 보졸레 누보의 이미지는 와인이 팔리지 않아 버려지거나 공업용 알코올로 변환될 정도로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겉절이만 맛있게 담그고, 김장김치는 맛 없는 집을 보신적 있나요? 다행히도 이 아픔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고급 보졸레 와인 생산에 성공하면서 현재 보졸레 와인은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현재는 가볍게 빨리 마실 수 있는 누보와 숙성 기간이 긴 고급 레드 와인인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Villages)를 함께 생산하는 방식을 유지합니다.

빌라주 와인은 체리나 딸기 같은 붉은 과실향과 함께 흙(Earthy), 후추 등 제법 복잡하고 미묘한 풍미가 잘 느껴집니다. 누보가 꿀떡꿀떡 가볍고 편하게 마시는 와인이라면, 빌라주는 가메 포도 품종의 잠재력과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 와인인 셈 입니다. 현재 빌라주 와인은 밭(Cru)별로 특성을 나눴습니다. 총 10개의 밭으로 구분될 정도로 다양하고 특징적인 복합미를 뽐냅니다.

분명 보졸레 누보는 단순한 와인입니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해서 저급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기라고 볼 것까지는 더더욱 없어보입니다. 오랜 기간 숙성한 복합미를 가진 고품질의 와인이라고 광고를 했던 것도 아니니까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간을 명랑하게 즐기고 싶을 때, 보졸레 누보 한 잔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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