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하는 존재, 고양이와 살기 [반려인의 오후]

김영글 2023. 11. 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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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는 스스로를 규정할 말을 찾아냈다.

호모 파베르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 즉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다.

도구를 만들어 노동하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하고, 문명을 고도로 발달시키며 효율과 성과의 세계로 우리 존재를 이동시킨 것은 분명 호모 파베르였다.

이때의 인간이 바로 놀이하는 사람, 유희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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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이 되는 동무’. 반려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고양이, 개, 식물 등 짝을 이뤄 함께 살아가는 반려인들의 단상을 담았습니다.
"고양이는 언제 어디서나 놀거리를 찾아낸다." ⓒ김영글 제공

현생인류는 스스로를 규정할 말을 찾아냈다. 처음에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였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인간의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다음에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등장했다. 호모 파베르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 즉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다. 이러한 인간관은 삶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할 줄 아는 능력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도구를 만들어 노동하고, 무기를 만들어 전쟁하고, 문명을 고도로 발달시키며 효율과 성과의 세계로 우리 존재를 이동시킨 것은 분명 호모 파베르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또 다른 규정을 제안했다. 그는 인간의 문명이 발전한 것은 사실 노동이 아니라 그 틈바구니의 시간, 여가시간을 통해서였다고 보았으며 여기서 창의성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능력을 발견했다. 이때의 인간이 바로 놀이하는 사람, 유희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유희란 놀고 즐기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생산성이나 효용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그러나 하위징아는 그 시간 속에 인간 실존의 근원이 있음을 강조한다. 놀이하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이지만 나머지 시간을 굴러가게 만들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미셸 투르니에가 영국의 고전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소설이다. 원작처럼 이 소설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된 배에서 집기와 도구를 옮겨와 무인도에 문명을 재건하려 애쓰고, 배를 만들어 고국으로 돌아갈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는 어린 흑인 소년 방드르디를 만나 변화한다. 방드르디가 섬에서 하는 일은 그저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것뿐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만난 뒤 목적 없는 유희를 만끽하고 원초적 생동감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감각을 깨우쳐나간다. 문명과 야생의 관계는 와해된다. 아니, 역전된다. 호모 파베르는 어느새 호모 루덴스가 되어 섬에 남기를 택한다.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소설을 떠올린다. 마치 방드르디를 지켜보던 로빈슨 크루소처럼, 나는 내 털북숭이 가족들을 관찰하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유희하는 존재’임을 알아차린다. 고양이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놀거리를 찾아내는 신통한 능력. 실 한 오라기, 콩 한 알만 가지고도 열과 성을 다해 노는 재주, 박스 구멍에 손을 집어넣거나 햇볕에 털을 고르며 뒹구는 것 같은 쓸모없는 일에도 아까워 않고 시간을 쓰는 관대함과 느긋함. 그런 모습은 언제나 잔잔한 감동과 함께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 큰맘 먹고 캣휠을 집에 들였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량이 부쩍 부족해진 고양이들의 건강이 염려되어서다. 거대한 쳇바퀴 형태로 된 이 기계는 야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실내 고양이의 질주 본능을 살려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주변 집사들이 너도나도 한 대씩 들여 고양이들이 신나게 타는 광경을 구경한 터였다.

하지만 정작 우리 집 녀석들은 꿈쩍도 않고 캣휠을 바라만 보았다. 타는 시범을 보여주느라고 내가 대신 올라탔다. 그런데 가볍게 한 발을 굴렸다가 원심력에 휘말려, 손쓸 겨를도 없이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고양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 꼴을 구경했다. 집사의 온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곤두박질쳐지는 광경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날 리 없는 집 안에서 흔치 않은 볼거리였을 테다. 몇 초간 널브러져 있다가, 웃음이 터져 나와 한참을 웃었다. 문득 이 도구의 용도가 무엇이 되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글 (미술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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