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1300억원 또 기부…"상속, 바람직하지 않다" 93살 버핏의 편지 [김재현의 투자대가 읽기]
[편집자주] 대가들의 투자를 통해 올바른 투자방법을 탐색해 봅니다.
매년 2월말 발표하는 연례 주주서한 말고도 가끔 버핏은 주주들에게 알릴 내용을 간단한 편지로 올리는 데요, 이번 편지는 A4 두 장에 달하는 제법 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금 찡한 내용도 있습니다. "93세임에도 여전히 상태가 좋지만 '연장전'을 뛰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실감하고 있다"는 구절입니다.
이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버핏은 이번 편지에서 사후 유산 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버핏은 버크셔의 지분 15%를 보유 중이며 금액으로는 1210억달러(157조원)에 달합니다.
버핏은 자신이 이 세상에 없을 때, 이 돈이 어떻게 쓰여지길 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버핏은 약 515억달러를 기부했는데, 이중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393억달러를 받았습니다. 또 버핏의 사망한 첫 번째 부인 이름을 딴 수전 톰슨 버핏 재단에 약 42억달러, 버핏의 세 자녀인 수전(70), 하워드(68), 피터(65) 버핏이 운영하는 재단에도 각각 24억달러 이상이 주어졌습니다. 참, 버핏이 이번에 내놓은 8억6600만달러도 4개의 가족 재단에 기부됐습니다.
이쯤 되면 의혹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버핏이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 가족 재단을 만들어서 기부하는 건 아닌가하는 의문 말입니다. 이번 편지에서 버핏은 자신이 사망하면 재산의 99% 이상을 받게 될 자선신탁의 신탁관리자와 유산 집행인으로도 세 자녀를 지명했습니다. 유언 신탁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만장일치로 행동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습니다.
하지만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버핏은 주식투자 실력도 그렇지만, 부에 대한 가치관도 보통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버핏은 이 기부서약으로 인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뿐 아니라 세 자녀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이미 생활에 충분한 돈을 받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받을 것이며 자신 역시 살면서 '원하는 것'은 모두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 살 것이라고 부연했습니다.
그런데 버핏의 원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우리 예상과는 약간 다릅니다. 버핏의 말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것들은 삶을 더 즐겁게 만들어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나는 값비싼 개인 전용기를 가지는 것은 좋아하지만, 집을 여섯 채나 소유하는 것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방대한 소유물들이 오히려 주인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건강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산은 흥미롭고 다양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입니다."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사는 버핏이 가끔 뉴욕이나 멍거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전용기는 좋아하지만, 궁궐 같은 저택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버핏이 재밌는 말도 했는데요. 버핏은 전쟁에서 전우를 구한 군인에게는 메달을, 훌륭한 교사에게는 학부모의 감사편지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반면, 주식의 미스프라이싱(mispricing·잘못된 가격 책정)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수십억 달러를 보상하는 사회에서 일해왔다고 말합니다. 이런 특별한 행운에 대해 자신과 가족은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감사하게 받아들인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버핏의 기부 서약에는 왜 버핏이 80%, 90%가 아닌 '99%'를 기부하겠다고 하는지 알려주는 대목도 있습니다. 버핏은 재산의 1% 이상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하더라도 자신과 가족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지만, 반대로 나머지 99%는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런 현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말합니다.
1210억달러의 1%면 12억달러(1조5600억원)입니다. 미국은 주마다 상속비율이 다르지만, 버핏의 두 번째 부인인 애스트리드 멍크스와 세 자녀가 나눠 가졌을 때 평생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금액입니다.
버핏은 자선신탁은 약 10년 후에는 자체 청산되며 최소한의 인력으로 유지되도록 당부했습니다. 즉, 버핏은 재단이 영속적으로 운영되길 원한 게 아니라 영향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버핏의 사후 10년간 모든 돈을 나눠주도록 설계한 겁니다.
참, 유언장을 두고 버핏과 세계 5위 부호를 아버지로 둔 세 자녀 간의 불협화음은 없었을까요? 이번 편지에 여기에 대한 내용도 나옵니다.
"비록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부분에서 '상속 재산(dynastic wealth)'이 합법적이고 보편적이긴 하지만, 제 자녀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상속재산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부자가 된다고 해서 현명해지거나 악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버핏도 버핏이지만, 버핏의 세 자녀인 수전, 하워드, 피터 버핏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들은 2006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어릴 때(1960~1970년대) "아버지는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었고 미국 2위 부호의 자식으로 자라지도 않았다"며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딸)이네요.
마지막으로 버핏은 자신이 사망한 후 자산의 처분은 '오픈북(Open book)'이 될 것이라며 유언장은 더글라스 카운티의 법원에서 열람할 수 있는 간단한 유언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더글라스 카운티 법원은 버핏이 사는 곳에 있는 법원입니다.
23일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발표한 이번 편지에서 버핏은 "추수감사절에 감사할 일이 많다"며 "버크셔를 소유하고 있는 모든 '파트너'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에게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라며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버핏은 버크셔 주주들을 파트너로 부르고 있으며 파트너들에게 1965~2022년 연평균 19.8%에 달하는 수익을 올려줬습니다. 버핏과 버핏의 파트너들이 즐거운 추수감사절을 보내길 기원합니다.
김재현 전문위원 zorba0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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