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930년대式 연애의 방법

김기철 기자 2023. 11.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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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 모던 경성]소프라노 채선엽과 물리학도 최규남…태평양 건너 온 편지로 시작
1938년 5월5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소프라노 채선엽 귀국 독창회 팸플릿/국립중앙도서관

1931년 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스무살 채선엽은 모교에 남았다. 피아노와 합창을 가르치는 전임강사였다. 어느날 사환이 항공봉투를 가져다가 책상위에 놓고 갔다. 발신지는 미시간 주립대 기숙사였는데, 모르는 이름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미시간 주립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생면부지 남성에게 편지를 받은 채선엽은 당황했다. 신문에 난 이화여전 졸업기사를 보고 무작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연희전문을 나와 미국에서 7년째 물리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해 겨울쯤 박사 학위를 따가지고 나올 수 있는 앞길이 창창한 남자라고 소개했다. 채선엽은 훗날 ‘그 편지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쓰여진 간결하고 건조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신문 기사 투의 글이었다’고 회고했다. 편지를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 하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그 덤덤한 투의 편지가 왔다. ‘안녕하시오’로 시작해 ‘안녕히 계시오’로 끝나는 점잖은 편지였다. 봄부터 시작한 편지는 가을이 깊어가자 뚝 끊어졌다. 채선엽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신문에 ‘최규남’이란 이름이 실렸다.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는 기사였다. 이듬해봄부터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강의를 하게 됐다던지, 그동안은 개성 송도고보에서 수학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 그런데 연말까지 편지가 없었다.

최규남(사진)은 연희전문 재학 시절, 야구 투수와 축구 골키퍼로 활약한 스포츠스타였다. 최규남의 활약덕분에 연전이 1925년 조선체육회 주최 야구, 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소개한 조선일보 1926년 3월16일자

◇연희전문 스포츠 스타 최규남

개성 출신 최규남은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 연희전문 수물(數物)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학업성적도 뛰어났지만 야구부 투수이자 축구부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1925년 조선체육회 주최 야구, 축구대회에서 전문학교부 우승을 차지한 1등공신이었다. 이 때문에 최규남이 1927년 미국유학을 떠난다는 기사가 스포츠란에 났을 정도다. ‘왕년 延專투수 최씨 渡美유학’(조선일보 1927년4월29일)이란 제목과 함께 사진까지 실렸다. 미국 체류 중 스포츠 기사를 본지에 쓴다는 약속까지 했던 모양이다.

최규남은 1933년 미시간주립대에서 이학박사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물리학 박사였다. 채선엽도 밝혔지만, 최규남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송도고보 시절부터는 고학을 시작해, 미국 유학까지 고학으로 마친 ‘개룡남’(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최규남 이력을 보면 1918년 송도고보를 졸업한 직후 송도보통학교와 송도고보 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모아 스물넷인 1922년 연희전문에 들어간다. 졸업 직후인 1926년에도 유학가기 전까지 1년간 송도고보 교사를 했다. 제 손으로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였다.

최규남이 1927년 미국으로 유학간다는 내용의 기사. 연희전문 투수로 유명했기에 스포츠란에 게재됐다. 조선일보 1927년4월29일자 기사

◇'이렇게 좋은 사람이 편지 솜씨는 왜 형편없었을까?’

이듬해 3월 채선엽은 학교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사환이 “선생님, 편지!”하면서 봉투를 건넸다. ‘최규남 배상’이었다. ‘제번하옵고’로 시작한 편지는 며칠 뒤 개성에 가서 누님을 만난 뒤 경성으로 갈터니 경성역 식당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외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채선엽은 ‘참으로 간명한 편지였다’고 기억했다.

고민하던 채선엽은 이화여전 동기인 모윤숙과 상의했다. 무조건 만나라고 했다. 나중엔 따라가 줄 터이니 만나라고 했다. 경성역 식당은 조용했다. 모윤숙이 “저기저기, 와 계셔”하며 이끌었다. ‘나는 너무 긴장하여 온 몸이 막대기처럼 굳어 있었다. 최규남, 그 분은 나를 보자 활짝 웃었다.’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둘은 종종 용산 야구장에서 만났다. 최규남은 송도고보때부터 야구선수였다. 경성에 시합하러 오면 늘 용산야구장에서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자기가 치기만 하면 홈런이었다고 자랑했지만 그 말을 믿진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가 한창 정신없이 야구 얘기를 하면 그의 얼굴을 멀거니 지켜보며 ‘이같이 좋은 사람이 왜 편지 쓰는 솜씨는 그렇게 형편없었을까?’하고 생각하며 혼자 웃곤 했다.’

채선엽을 피아니스트 겸 성악가로 주목한 잡지 기사. 1931년 이화여전 음악과 졸업 당시 사진으로 보인다. 조선중앙일보에서 발간한 잡지 '중앙' 1934년6월호 기사

◇오빠 채동선 친구 현제명이 약혼식 주례

전남 벌교 출신인 채선엽의 열살 위 오빠 채동선(1901~1953)은 연희전문 교수 현제명과 친구였다. 가곡 ‘고향’ ‘그리워’로 유명한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이다. 현제명이 채동선 남매를 자기집에 초대했는데, 최규남이 먼저 와있었다. 당황한 채선엽이 쩔쩔매다가 최규남을 오빠에게 소개했다. 채동선은 다 아는 일을 갖고 뭘 그러느냐는 투로 농담을 했다. 채선엽,최규남 커플의 연애는 공식화됐다. 1933년 10월 둘은 약혼했다. 현제명이 주례를 섰다. 이듬해 4월 이화여전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선남선녀의 결혼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여류 성악가로 이름높은 채선엽씨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는 26일 오후4시반 이화전문대강당에서 식을 치르는데 신랑되시는 분은 연희전문교수 최규남씨올시다.’(‘결혼하는 채선엽씨, 조선일보 1934년4월21일) 성악가 채선엽이 야구선수 출신 물리학자 최규남보다 더 유명했던 모양이다.

채선엽은 1938년3월25일 동경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2년간의 유학을 결산하고 일본 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연주회였다. 조선일보 1936년3월11일자 기사

◇정훈모 독창회의 자극

‘테니스 코트에서 라켓을 받아 ‘탱.탱’소리내며 튀어 오르는 흰 정구공처럼 나는 온 몸이 드높이 떠오르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신혼초 채선엽은 맘껏 행복을 누렸다. 첫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그랬다. 하지만 채선엽은 육아에 매달려 제대로 성악을 공부할 수 없었다. 어느날 부부가 함께 정훈모 독창회를 다녀왔다. 동경제국음악학원을 졸업한 정훈모는 1932년 12월1일 정동 모리스홀에서 첫 독창회를 열어 ‘북구의 飛鳥같은 여류 가인’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곡목은 독일 것으로 특히 서정곡을 수로하여 슈베르트와 슈만 등의 것이었다. 그리하야 노래는 독일말로 하여 말을 알아들었을 이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로되 그의 맑고 유하고도 힘있는 발성에 명확한 발음과 주의 깊은 ‘엑쓰프레슌’은 가사를 모르고 듣던 사람들도 많이 그 노래의 뜻하는 바를 감득할 수가 있을 만하였다.’(‘새해 음악 스테지의 화형 정훈모여사 박경호씨’, 1933년1월2일) 피아니스트 박경호와 함께 새해 음악계의 희망으로 손꼽히는 기대주였다.

정훈모(1909~1978)는 훗날 서울대음대 성악과 창설 멤버로 예술원회원이 된 성악계 1세대다. 1930년대초까지 찬송가를 부르던 수준의 성악계에서 독일 가곡을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 충격을 줬다. 정훈모는 1935년5월4일 경성공회당에서 세번째 독창회를 가졌다.(‘정훈모씨 독창회’, 조선일보 1935년5월5일) 박경호가 반주를 했다. 채선엽 부부는 이 독창회를 본 것 같다.

최규남은 광복후 서울대총장, 문교부장관을 지낸 과학계 1세대였다. 채선엽은 이화여대 교수로 김자경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부부는 53년간 해로했다.

◇가정부를 엄마라 부르고, 날 ‘동경 엄마’로 불러

공연을 보고 돌아온 채선엽은 부엌에서 눈물을 흘렸다. 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리던 정훈모가 부러웠고, 갓난 아이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스스로가 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이는 내가 홀짝거리는 걸 보고도 암말이 없더니 며칠 뒤에 나를 불러 놓고 조용히 말했다.”당신같이 재능있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집안에서 썩어야 하는 건 나도 가슴아프오. 아이는 내가 어떻든 기를 테니 동경 가서 성악 공부를 정식으로 해보는 게 어떠오”’ 채선엽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동경행을 선택했다.

1936년 돌이 채 안된 아이를 떼어두고 유학을 떠났다. 2년만에 돌아왔더니 아이는 가정부를 ‘엄마’라 불렀고, 채선엽을 ‘동경 엄마’라고 불렀다. 아이를 부르면 잘 오지도 않고 가정부 치맛자락만 붙들고 다녔다.

◇서울대 총장, 문교부장관 최규남

채선엽은 일본에서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유학해 벨칸토 창법에 조예가 깊은 일본인 성악가였다. 채선엽은 오사카 공회당과 도쿄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채선엽씨 동경서 독창회’, 조선일보 1938년3월11일)를 열고 호평을 받았다. 1938년4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취임했고, 그해 5월5일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졌다. 광복 후에도 이화여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김자경 김복희 김영환 채리숙 등 음악계를 이끌어간 성악가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최규남은 광복 이후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5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과 함께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64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설립준비위원장을 지냈다. 한국 과학계를 일군 1세대 원로였다. 부부는 53년간 해로했다. 채선엽은 1987년 별세했고 최규남은 5년 뒤인 1992년 아내의 뒤를 따랐다. 채선엽은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자신은 결코 예술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라며 남편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편지로 맺어진 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참고자료

털어놓고 하는 말1, 뿌리깊은 나무,

동운논집,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58

한상우,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지식산업사, 2003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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