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 논란’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다[젠더살롱]
언론이 널리 보도한 대로, 이달 4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경남 진주시의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행패를 부리고 이를 제지하려 한 20대 여성 종업원을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에 의하면 이 남성은 자신이 ‘남성연대’ 회원이며, 여성 종업원의 머리가 짧은 것을 보고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고,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하기에 때렸다고 진술했다 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젊은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페미’ 여부를 드러내는 척도가 된 듯하다. 소위 ‘페미’로 낙인찍힌 여성들은 사고, 언어, 태도 및 행동을 재단당하며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21년에는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가 양궁선수 안산의 짧은 머리를 ‘페미’의 증거로 지목하고 양준우 당시 국민의힘 대변인이 안산 선수의 계정을 뒤져 ‘남혐 용어’를 쓴 적이 있다며 비난했다. 안산 선수의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비방과 욕설로 도배가 되었고 그녀는 한동안 자신의 계정을 닫아야 했다.
여성 운동선수들은 스포츠계 전문인이기 이전에 여자의 육체를 드러내는 이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여성 선수들의 외모에 대한 지적이 기존 미디어 및 개인 SNS를 채우는 일은 드물지 않다. 최근 스포츠 학계에서는 이런 상황을, 관람자들이 선수에게 위해와 폭력을 행하는 ‘스포츠 관중 폭력’으로 본다. 그러나 이 사태를 폭력으로, 안산 선수를 온라인 학대의 피해자로 본 한국 언론은 거의 없었다. 한국 언론 대부분은 SNS의 피드들에 상상을 보태 ‘페미 논란’이라는 프레임으로 신나게 퍼나르며 사태가 확산되는 데 기여했을 따름이다.
이번 진주시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는 대부분 경찰 보고를 인용한 건조한 해설체 기사들에 가해자의 조현병 전력이 따라붙는 식이다. 언론들이 반성하고 나아졌다기보다 유명 운동선수와 정당 대변인의 이름이 거론되며 한껏 대중들의 주목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2021년 사태와 비교하면 보통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번 사건은 ‘뉴스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조현병 전력 언급은 이런 사건의 가해자가 정신질환의 소유자이기에 제대로 처벌할 수 없으며 예외적인 사건이라는 이미지를 더한다.
그런데 도대체 머리길이는 어떻게 해서 ‘페미’ 여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 것일까?
여성 헤어스타일 잔혹사
오랫동안 머리길이를 포함한 헤어스타일은 개인들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그러니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머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라 남성 관음증의 대상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메두사는 흔히 신의 노여움을 사 아름다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뱀으로 변한 흉측한 괴물로 여겨지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몇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공통점은 아테나 여신 신전의 무녀였던 메두사가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에 분노한 아테나 여신이 그녀의 머리카락은 뱀으로, 그녀의 시선이 닿는 생명체는 돌로 변하는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전을 더럽힌 데 대한 아테나의 분노였다는 설도 있고, 아테나가 포세이돈을 사랑해서 질투에 사로잡혀 저주를 내렸다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강간 폭력의 피해자 메두사가 그 아름다운 머리로 원인을 제공한 일종의 가해자로 전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메두사를 표현한 그림들에서 그녀의 표정이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빨강 머리 여성이 성적으로 난잡하다거나 창녀로 매도되어 왔다. 예수를 판 유다가 빨간색 머리카락이어서 그때부터 빨강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불길한 자들로 여겨졌다는 설도 있고,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피부색과 함께 특유의 곱슬머리를 흑인 신체 특히 흑인 여성 신체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온 역사도 유서 깊다. 2021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책 'Sister style: The politics of appearance for black women political elites'에서 저자들은 흑인 여성 정치가와 지망생들이 곱슬머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프로페셔널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시달리면서 경력을 쌓는 데 어려움을 겪은 각종 일화를 분석한다. 또한 흑인 여성 운동 선수들은 곱슬머리가 지저분해 보인다는 SNS상의 혐오 코멘트를 끊임없이 듣는다.
조선 시대에 머리카락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부모가 물려준 것이었다. 유교적 효의 규범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던 그 시절 사람들은 신분, 성별, 나이, 혼인 유무에 따라 다른 헤어스타일의 규범을 따라야 했다. 변화가 온 건 일제시대였다. 특히 개화한 지식인들의 짧은 머리는 유교 규범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각적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신여성들의 모던한 헤어스타일, 특히 보브라고 불리는 짧은 단발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신여성들의 단발은 여성의 사치와 허영의 상징으로 언론에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당시 일제와 조선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의 짧은 머리에는 그와 같은 비난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았다. 남성은 ‘신체의 봉건제’에서 벗어났지만 여성은 여전히 포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후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결혼 전 한국 여성들은 긴 생머리를, 결혼 후에는 소위 ‘아줌마 파마’를 하는 게 대세였다. 긴 생머리는 미혼의 여성들이 잠재적 결혼 상대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청순한 이미지를 부여해주었다.(그 시절 ‘스트레이트 파마’라는 게 얼마나 유행했던지!) 그렇지만 결혼 후에도 긴 생머리를 유지하면 사치스럽고 허영심 많은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았다. 손질할 필요 없는 ‘아줌마 파마’는 아이 낳고 살림하느라 바쁜 기혼 여성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여성들에게는 결혼 여부와 나이에 따라 다른 헤어스타일 규범이 작동했던 것이다.
청년 여성은 청년이 아니란 말인가
헤어스타일을 비롯한 외모 관리는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젊은 여성들이 제기한 어젠다 중 하나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온라인 여성 혐오 문화가 판을 치던 2000년대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화장과 다이어트를 일상으로 받아들인 세대다. 20, 30대 여성들은 자라서 보니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고 남성들에게는 이 정도의 외모 관리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데 억울함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짧은 머리는 이들이 주도한 ‘탈코르셋 운동’에서 제시한 하나의 스타일이다.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해 왔다. 긴 머리를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도 있다는 의견부터, 가부장제가 강요해 온 획일적인 여성적 외모에 대한 대안이 또 하나의 획일적인 스타일인 것은 문제라는 비판까지, 온라인상에서, 논문과 연구, 기사를 통해 다양한 스펙트럼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진행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스타일이 지금보다 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라인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접해 온 어떤 남성들은 머리카락을 여성성의 상징으로 만들며 여성들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해 온 역사에 대해서도, 초현대 한국 사회 젊은 여성들을 옥죄어 온 오랜 가부장적 규범과 외모 관리 산업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무지하다. 확증 편향과 집단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온라인상 혐오가 현실의 폭력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몇몇 ‘조현병’ 환자들이 저지르는 예외적인 폭력이 아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비롯해 온라인 혐오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소위 ‘청년 정치’의 대표가 된 이들, 이들을 영입하는 것으로 청년들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한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청년 여성은 청년이 아니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남성이 여성을 구타할 때 다른 남성이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는 사실 정도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남성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의 신체는 남성 폭력의 이유일 수 없다. 이 명백한 사실은 우리 시대 청년 정치의 핵심 어젠다가 돼야 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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