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동법 날치기 없었다면, IMF 갈 일도 없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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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① 위기가 오는 징후들
1997년 11월 21일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신청으로 본격화된 ‘IMF 사태’를 일컬어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하는 건 그리 심한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날씨마저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기업이 줄줄이 문을 닫고 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났습니다. 30대 그룹 중에 11개가 해체되었고 성장율은 순식간에 -5.1%(1998년)로 고꾸라졌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고 IMF 요구에 따른 타율적 개혁을 강요받았습니다. 26년이 지났습니다. 녹록치 않은 안팎 상황은 다시 추운 겨울이 올 수 있다는 있다는 경고음을 냅니다. 노동개혁, 금융개혁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손병두 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은 ‘빅딜’이라 불린 산업 구조 개편의 밑그림을 그리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IMF 위기 극복 과정의 한 가운데 있었던 사람입니다. 손 부회장의 회고를 빌어 IMF 위기가 남긴 값비싼 교훈을 돌아봅니다. 〈편집자 주〉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불쑥 닥치지 않는다. 자연 재난이 그렇듯이 경제 위기에도 반드시 그 전조가 있는 법이다. 그 규모가 클수록 위기의 징후는 더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경고음을 울린다. 그 징후를 알아보고 방책을 세운다면 위기가 닥쳐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97년의 대한민국은 그러지 못했다.
한국 경제는 1996년부터 눈에 띄게 기울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부도 근본 치유 대책들을 마련했다. 그 무렵 나는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으로 일하다 97년 2월 전경련 상근 부회장으로 옮겼다. 나는 전경련을 대표하여 김영삼(YS) 정부의 노동관계개혁위원회와 금융개혁위원회에 참여했다.
노동법 재개정하겠다고 물러선 YS
그런데 12월 26일 아침 출근길에서 “오늘 새벽 6시 신한국당 단독으로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는 뉴스를 들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여당에서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가. 아니나 다를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하고 서울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야당도 가세했다. 사태가 악화하자 YS는 97년 1월 21일 3당 영수회담 후 여야가 합의해 오면 노동법을 재개정하겠다고 두 손을 들었다. 너무 아쉬웠다. 모처럼 노사 간 상생 가능한 개혁 법안을 만들어 놓고도, 날치기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빛을 못 본 채 운명을 다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전경련은 재개정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다. 97년 1월 15일부터 3월 6일까지 거의 매일 전국 일간지에 11회 시리즈 광고를 냈다. ‘경제가 살아야 고용안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빠진 노동법 개정은 자유시장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립니다.’ 등등 거의 매일 제목을 바꿔 가며 신문광고를 내 보냈다. 광고 초안은 공병호 박사가 만들었다. 급기야 여론이 움직이고 신문 사설도 나기 시작했다.
노동법 재개정 논의는 정치권에서 신한국당 이상득 정책위의장, 자민련 허남훈 정책위의장, 새정치국민회의 이해찬 정책위의장 세 사람이 주도했다. 사용자 측에서는 조남홍 경영자총협회 부회장과 내가 참여했다. 우여곡절 끝에 3월 10일 단일안을 만들었다. 늦은 밤에 합의가 이뤄져 사인을 하자고 했더니 이해찬 의장이 “내일 아침에 하자”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이 의장은 노조전임자 무임금 제도를 5년간 유예하고, 전임자 수를 줄이는 만큼 그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노조기금으로 만들어 주자는 새 제안을 들고 나왔다. 이상득 의장은 무척 난감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켜 내긴 했지만 시행은 5년 뒤로 미룬 어정쩡한 노동법이 되고 말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YS 정부의 대외 신인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노동개혁의 실패가 YS 정부의 레임덕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이것이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때 신한국당이 날치기로 단독통과시키지 않고 야당과 노동계의 협조를 구하는 절차를 밟았더라면, 기업은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경제에 주는 충격을 덜면서 성장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볼수록 아쉬운 것은 야당 지도자들이 모두 1월 통과를 양해해 준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보름 정도만 기다렸으면 될 일을 왜…”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후진적 금융시스템 개혁도 지지부진
노동개혁과 금융개혁이 좌초되는 가운데 97년 1월 한보가 부도를 냈다. 포스코가 인수한다더니 진척이 없었다. 5월에는 기아가 부도 사태에 이르렀다. 삼성이 인수하고자 할 때 언론들이 들고 일어나 국민기업을 특정기업에 넘길 수 없다는 논리로 막았다. 정부도 이에 동조했다. 결국 7월에 부도가 났다. 외국투자자들의 눈에는 1996년 12월에 통과된 노동개혁 법안이 재개정되고, 한보·기아 등 부실기업 정리도 신속히 처리 못하는 한국 정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문제가 있으면 정부가 해결해 줬는데 이제는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며 한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정부 당국자를 만날 때마다 이런 비유를 자주 했다. “경부고속도로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대전에서 사고(한보 사태)가 났고 천안에서도 사고(기아 사태)가 났다. 빨리 사고 차량을 빼줘야 길이 막히지 않을 것 아닌가, 이제 차들이 밀려 부산에서 출발도 못할 지경이다.” 경제의 흐름이 한 곳에서 막히면 신속히 뚫어줘야 동맥경화를 막고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YS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달성해 칭송을 듣고 싶어했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고자 무리를 했다. 저환율정책을 고수하면서 금융의 문호를 개방했다. 은행, 증권사 등이 앞다투어 해외로 나갔다. 단자회사들도 종금사로 바뀌면서 해외진출을 서둘렀다. 장기금융도입은 심사하면서 종금사가 도입하는 단기금융은 심사도 하지 않았다. 종금사들은 3%의 저금리로 단기자금을 꾸어다가 국내 기업에 8% 정도로 대출하면서 큰 금리차익을 챙겼다. 기업들의 국내 조달금리가 12%정도였을 때 8%는 싼 금리였다. 기업들은 단기자금을 빌려서 장기 시설투자를 했다. 계속 연장을 해 장기자금처럼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97년 7월 태국의 바트화가 무너졌다. 이어서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으로 외환위기가 북상했다. 우리 정부는 “한국경제의 펀더멘탈이 튼튼하니 걱정 없다”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데 급급했다. 외국 금융계가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몰린 종금사들은 단기 금융의 상환 기간을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았다.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서 갚아 나갔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급격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먼저 일본계 은행들이 한국에서 돈을 빼냈다. 그걸 보고 유럽, 미국계 은행들도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는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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