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타고난 나로 살기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앨리스 먼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수록, 곽명단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아버지는 은여우들을 길러 모피값이 오르는 쌀쌀한 계절에 잡아 껍질을 벗겨 털가죽을 파는 일을 했다. 여우마다 이름을 지어 이름패를 우리의 문 옆에 걸어두었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산 여우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털 때문에 은여우라고 불리는, 그들의 순전한 적의가 서린 절묘하게 날카로운 얼굴선과 금빛 눈동자를. 이 여우들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소설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냥 계집아이일 뿐.
남동생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컸다. 어둠이 무서워서 밤에 둘이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나는 어둠 속에서 나에게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용기와 담력을 발휘하는 이야기, 말타기와 총 쏘기가 나오는 이야기. 말타기에는 실력은 없지만 내가 돌봐야 할 말이 생겼다. 암말인 플로라. 나는 “힘차게 뛰어오르고 날쌔게 내달리는 용감무쌍하고 자유분방한 플로라의 모습에 반했다.” 그런데 집에 왜 말이 두 마리나 있느냐면, 여우의 먹이가 말고기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도 나에게 말했다. 계집애가 문을 꽝꽝 닫으면 못 쓴다고, 계집애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한다고. 내가 뭘 물으면 계집애가 그건 알아서 어디에다 쓰냐고 했다. 처음에 나는 계집애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같이 “천진난만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계집애는 “그냥 본디부터 타고난 내가 아니라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내 자유를 스스로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게 맞는지 알 수가 없어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다가 생각한다. 내가 과연 가족들이 바라듯 여자처럼 예쁘게 자랄 수 있을까, 라고.
아버지는 이제 플로라를 죽여 여우의 먹이로 만들려고 한다. 한 살 더 먹은 나는 그동안은 동물을 죽이는 일이 살자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구간에서 끌고 나오는 사이에 길들지 않은 플로라는 도망을 쳤다. 총을 든 아버지는 나에게 울타리 대문을 닫으라는 일을 시켰다. 말이 샛길로 도망가려면 그 문을 통과해야 하므로.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저녁 자리에서 동생은 누나가 한 일을 아버지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가 체념한 듯 말했다. “계집애일 뿐이니까.”
이 계집아이는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열여덟 살에 대학으로 가며 영영 집을 떠났다. 부모는 원하지 않았다. 여자가 자아를 찾는다는 일을 좋지 않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집을 떠난 후 소설을 썼다. 출산과 육아 등으로 시간을 충분히 내지 못해 거의 단편만 썼다. 그러다가 단편 쓰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013년, 82세가 되었을 때 앨리스 먼로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수상의 경위를 이렇게 밝혔다.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단편 소설을 가장 완벽하게 예술의 형태로 갈고 닦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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