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도발 제어할 ‘브레이크’ 없는데, 정부는 ‘안전핀’까지 제거
북한이 군사용 정찰위성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정부는 ‘판문점 선언(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9·19 군사합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했다. 북쪽은 기다렸다는 듯 “합의에 따라 중지했던 모든 군사적 조치들을 즉시 회복할 것”이라고 맞받았다. 한반도 정세가 다시 격랑으로 치닫고 있다.
북 “만리를 굽어보는 눈과 때리는 주먹 가져”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23년 11월22일 이른 아침 평양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보도-정찰위성 성공적으로 발사’란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통신은 11월21일 밤 10시42분28초에 평안북도 철산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신형 위성로케트 ‘천리마-1형’에 탑재해 성공적으로 발사했다”고 전했다. 또 ‘천리마-1형’이 “예정된 비행고도를 따라 정상 비행해 발사 후 705초 만인 22시54분13초에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궤도에 정확히 진입시켰다”고도 했다.
통신은 같은 날 오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방문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김 위원장이 “궤도에 진입한 정찰위성 ‘만리경-1호’의 작동 상태와 세밀 조종 진행 정형(실태·현황), 지상 구령에 따른 특정 지역에 대한 항공우주촬영 진행 정형을 료해(이해)했다”고도 덧붙였다. 특히 김 위원장이 “11월22일 오전 9시21분에 수신한 태평양 지역 괌 상공에서 앤더슨 공군기지와 아프라항 등 미군 주요 군사기지 구역을 촬영한 항공우주사진”을 봤다고도 밝혔다. ‘만리경-1호’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주장이다.
북쪽은 관련 위성사진을 화면에 띄워놓은 평양종합관제소의 전경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통신은 김 위원장의 말을 따 “공화국 무력이 이제는 만리를 굽어보는 ‘눈’(정찰위성)과 만리를 때리는 강력한 ‘주먹’(핵미사일)을 다 함께 틀어쥐었다”며 “우리의 위력한 군사적 타격 수단들의 효용성을 높이는 측면에서나, 자체 방위를 위해서도 더 많은 정찰위성들을 운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새삼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12월 개최 예정인)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2024년도 정찰위성 발사 계획을 심의하고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찰위성 추가 발사를 예고한 셈이다.
북한 ‘궁극의 억지력’ 갖추는 단계 가나
북한은 2021년 1월 열린 제8차 당대회에서 군사정찰위성 개발을 “우주개발 부문 최중대 과제이자 전략무기 부문 핵심 과업”으로 제시했다. 김 위원장은 정찰위성의 목적에 대해 “남조선 지역과 일본 지역, 태평양상에서의 미 제국주의 침략군대와 그 추종세력들의 반공화국 군사행동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보하고, “전쟁 대비 능력을 완비하기 위한 급선무적인 사업”이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정찰위성이 상대방 표적 감시 외에 유도무기 제어 구실도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핵무기 운용에 정밀성을 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3대 핵전력’(뉴클리어 트라이애드) 가운데 북이 확보한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뿐이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잠수함과 장거리 폭격기가 없기 때문에 교과서적 의미의 ‘핵무력 완성’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 ‘확장억제’를 바탕으로 자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방어하겠다고 약속한 한국과 일본을 타격할 능력은 갖춘 것으로 보인다. 복합적인, 새로운 형태의 핵위협이다.”
북이 실제 정찰위성 발사에 성공했다면, 제8차 당대회에서 개발을 공언한 전략무기 가운데 이제 남은 것은 ‘핵추진 잠수함’뿐이다. 핵잠수함은 ‘보복타격’ 능력을 상징한다. 선제타격을 당하더라도 상대국 주변 해상에 배치된 핵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보복타격을 할 수 있다. 보복타격 능력을 갖춘 상대에겐 선제타격을 가하기 어렵다. 궁극의 ‘억지력’이란 뜻이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냉전시절에도 보복타격 능력을 갖춘 상대는 핵국가로 인정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북은 지금 그 단계로 나아가려는 것 같다”고 짚었다.
전직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는 향후 정세를 묻자 “세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한반도 평화 안보와 관련한 모든 협상이 중단된 상태다. 북-미, 남북 모두 접촉이 끊겼다. 협상이 중단된 시기에 북은 핵무력 고도화에 집중했다. 정찰위성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둘째, 북·중·러 대 한·미·일 대립관계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북으로선 중국과 러시아의 정치·군사적 지지를 받을 여지가 넓어졌다. 셋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대응이 불가능해졌다. 북이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면 자동으로 제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이른바 ‘방아쇠’(트리거) 조항이 중·러의 반발로 무력화됐다. 북의 ‘도발’을 제어할 국제적 규범은 유명무실해졌고, 안보리 차원의 추가 대응도 불가능해졌다. 정세 악화를 막을 ‘브레이크’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 “군사분계선에 강력한 무력 전진 배치”
그럼에도 정부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남북 간 우발적 재래식 군사충돌을 막기 위해 육·해·공 3면에 걸쳐 군사활동 금지 구역을 설정한 9·19 군사합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하는 것을 대응책으로 내놨다. 마지막 남은 ‘안전핀’을 스스로 제거한 꼴이다. 북쪽은 곧바로 국방성 명의의 성명을 내어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취하였던 군사적 조치들을 철회하고 군사분계선 지역에 보다 강력한 무력과 신형 군사장비들을 전진 배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이 정찰위성을 발사한 11월21일 미 해군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함이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했다. 이튿날엔 핵추진 잠수함 샌타페이함이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했다. 11월25일과 26일로 예고된 한·미,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면, 북쪽이 무력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커 보인다. 잊고 있던 ‘한반도 위기론’이 연말을 달굴 조짐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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