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돌 맞은 국가인권위는 지금 ‘적체·독단·막말·쟁송’ 위원회
117일째 안건 270건 넘게 적체
내부 협의 무시하고 안건 기각
성소수자·노동자에 혐오 발언
시민 상대 고소·수사의뢰 남발
김용원·이충상 인권위 상임위원
소송 반복하며 신뢰도 떨어뜨려
“의미 없는 기관으로 전락” 우려
국가인권위원회가 25일 설립 22주년을 맞았다. 박진 인권위 사무총장은 지난 23일 열린 국제콘퍼런스에서 “(인권위는) 아직 인사·조직·예산에 관해 다른 행정부처와 마찬가지로 소관 부처 협의를 거쳐야 하는 등 독립성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최근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을 운운할 처지가 못 된다. 정부 출범 후 몇몇 인권위원이 들어온 이후 인권위 내부의 분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회의 석상에서 인권위원들이 고성과 막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아예 위원회 회의를 열지 않기도 한다. 인권위의 문을 어렵게 두드린 피해자들은 이렇다 할 구제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적체
24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김용원 인권위 상임위원이 위원장을 맡은 ‘침해구제 제1위원회’는 적체된 안건이 270건(지난 20일 기준)을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일 218건, 지난 7일 231건이던 적체 안건은 조만간 300건을 넘어설 추세다.
지난 7월31일 마지막으로 열린 침해구제 제1위원회는 이날까지 116일째 열리지 않고 있다. 김 위원이 ‘소위원회 개최 중단’을 선언한 것이 ‘개점휴업’의 주된 배경이다.
발단은 정의기억연대가 제기한 ‘경찰의 수요시위 혐오집회 부작위’ 진정이었다. 이 진정에 대해 김용원·김종민 위원은 기각 의견을, 김수정 위원은 인용 의견을 냈다. 사무처는 지난 9월8일 “위원 간 재논의 등 해결 방안을 모색했으나 김용원 위원이 재논의를 거부했다”는 해명자료를 배포했다. 이에 김 위원은 “소위 결정에 대해 사무처가 일방적으로 해명자료를 냈다”면서 송두환 인권위원장에게 해명자료를 작성한 직원들을 인사 조처하라고 요구하며, 인사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 소위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인권위가 시간을 끌다 흐지부지한 대표적 사례는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 사건이다. 김 위원은 박 대령 보직해임 후인 지난 8월9일 군인권보호관 자격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박 수사단장에 대한 징계·수사를 즉각 보류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이후 군인권센터는 해당 사건을 조사해달라며 군인권보호관에게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그러나 김 위원은 이 건을 논의하기로 한 회의에 돌연 참석하지 않았다. ‘병원 진료’가 이유였다. 다른 위원들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는 이유로 군인권보호위원회 회의도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인권위 논의가 지연되는 사이 박 대령은 징계를 받았다.
■독단
진정사건의 인권침해 가능성을 ‘폭넓게 보고 신중하게 논의하자’는 인권위의 전통은 무력해지는 중이다. 소위원회 단계에서부터 높은 기준을 적용해 아예 안건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사라지는 일이 인권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간 인권위는 ‘합의제 기구’라는 특성을 인정해 소위원회에서 한 사람이라도 인용 의견을 내면 해당 안건을 전원위원회로 올려왔다. 그러나 김용원 위원이 소위원장을 맡은 침해구제 제1위원회는 정의연 진정 건에서 1명의 인용 의견을 무시하고 기각 처리했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지난달 30일 전원위원회에서 아직 심의를 완료하지 않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조 진정사건에 대해 “기각하겠다”고 선언했다. 전원위원회에 올라간 사건은 다른 인권위원과 논의해 공통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 위원은 자신이 해당 사건 소위원장이므로 이 사안을 기각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막말
이 위원은 성소수자, 이태원 핼러윈 참사 피해자, 노동자 등을 향한 혐오성 발언으로 연일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위원은 지난해 11월 전원위원회에서 에이즈예방법 일부 조항의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헌법재판소 의견 표명 건과 관련해 단독 반대의견을 제출하면서 자신이 쓴 논문을 첨부했다. 논문에서 이 위원은 “감염인이 공중보건체계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이들이) 콘돔을 쓰지 않고 불건전한 성행위를 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 감염인 스스로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난해 12월28일 열린 상임위에서는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에 대해 “이런 입법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는 참을 것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불법행위자를 보호하는 것으로서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지난 3월23일 회의에서는 “훈련소에서는 자살·자해가 없다”며 “같은 계급, 같은 기수끼리 훈련을 받기 때문에 내무반에서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쟁송
검사 경력의 김 위원과 판사 출신인 이 위원이 시민사회나 언론을 향해 고소·수사의뢰 등을 남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위원은 지난 9월 군인권센터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상대로 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군인권센터 관계자가 김 위원을 두고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 수사에 윗선 개입이 의심된다”고 발언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권위원이 군 사망자 유가족을 수사의뢰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 김·이 위원은 지난 3일 임 소장과 군 사망자 유족 10여명을 특수감금·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수사의뢰했다.
김 위원은 입장문에서 “불법 침입” “장시간 난동” “감금”이라는 표현을 썼다. 반면 군인권센터는 “유가족들은 복도에서 면담을 요구하다 위원장과 면담을 진행했을 뿐이고, 인권위 관계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직무 수행을 방해하거나 기물을 파손한 바가 없다”며 “이충상 상임위원은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갔다 오기까지 했다”고 반박했다.
이 같은 파행에 인권위가 앞으로 제 기능을 못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한희 변호사(희망을만드는법)는 지난 16일 ‘인권위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일부 위원들이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다 민형사상 조치로 대응하고 있다”며 “점점 인권위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의미 없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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