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변해야 하는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 사이에서
세상은 인연 따라 변한다. 그 변화 과정에서 조건을 따라가려는 원심력과 본질을 지켜내려는 구심력이 팽팽히 맞선다.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문화 할 것 없이 두 힘이 부딪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때로는 발전하거나 때로는 퇴보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수와 진보로 분류하기도 한다.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끊임없는 혁신을 표방하는 비즈니스 업계와는 달리, 전통을 숭상하거나 수호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종교단체의 경우는 매 순간 이런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전통을 보존 혹은 보전한다는 것이 단순히 새로움을 거부하고 과거의 유산을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통과 혁신 사이의 긴장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두 가지 힘이 매 순간 충돌하게 되며, 새로운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필자는 한국불교의 전통 사찰승가대학에서 기본 교육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갓 출가한 사미가 정식 스님이 되기 위한 과정인 비구계를 받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수업과 일상에서 개성 넘치는 학인 스님들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디지털 문화가 체화된 이른바 ‘MZ세대’라고 하는 이들의 감각과 세계관은 때때로 전통적 가치나 생활방식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학인 스님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당장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옳은지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애초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하거나 혹은 그냥 불허한다면 단순히 끝날 문제지만,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전면적으로 허용할 것인지, 아니면 제한적으로 할 것인지, 그 기준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이 많아진다. 달리 보자면, 이 문제는 전통 가치를 중시하는 공동체에 막 들어온 수습 과정의 구성원에게 어느 정도 외부와의 연결을 허용할 것인지 혹은 외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학인 스님들과 살아가다 보면 짙은 안개가 낀 듯 눈앞에 길은 잘 보이지 않고, 답답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오래된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장점은 이럴 때 옛 스승에게 길을 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연불변(隨緣不變), “법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不變)’과 인연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수연(隨緣)’의 뜻이 있으니, 이에 맞추어 글이나 방편을 베풀 수 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이 같은 가르침을 남기셨다. 학인을 이끄는 방법에 대해서도 휴정 스님은 말하였다. “학인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본분(本分)을 단련하는 집게와 망치를 제기한 다음에 새롭게 훈습하는(新熏) 자물쇠와 열쇠를 보여주어야 한다. 출세간의 풍격에 어두워서도 안 되며, 여러 방면에 통하는 계략을 잊어서도 안 되고, 양쪽 모두에 밝아 나란히 해와 달이 뜬 것처럼 해야 하며, 하나의 눈을 갖추어 명백하게 고금을 판별해야 한다.” 이처럼 휴정 스님은 스승 역시 본분과 신훈, 출세간과 여러 방면이라는 양쪽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고 말한다. 즉 학인과 스승 모두에게 수연불변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휴정 스님의 관점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쓴다면 승가 교육에서의 전통과 혁신, 유지와 개혁은 대립하거나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루 갖추어져서 통합적인 교육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과 더불어 시대의 급변하는 흐름, 그 연(緣)에 따른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능력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단 승가에만 국한된 가르침이 아닐 것이다. 국가뿐만 아니라 과거의 전통 유산을 지켜나갈 책무가 있는 공동체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전통을 지켜내고 발전시켜 온 것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혁신적인 시도들이었다. 고려 팔만대장경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신앙과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당대 첨단의 과학 기술이 있었다. 습도, 통풍, 온도 조절이 가능한 내부 설계와 목판 조형 및 마감 등 최신 과학 기술에 열려 있는 자세가 불교를 대표하는 전통을 보존해 온 것이다. 인류 보편의 문화적 성취 뒤에는 혁신의 역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스님들의 겨울 집중 수행 기간인 동안거가 시작된다. 다시금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고 안거에 들어간다.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힘과 변하지 않게 지켜 나가야 하는 힘 사이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몸부림칠지가 화두가 된다. 산중에는 동안거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첫눈이 내렸다. 춥고 길고 긴 안거가 될 듯하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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