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군사합의 폐기…‘헤어질 결심’인가
단 이틀 만에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5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북한은 11월 23일 “9·19 남북군사합의에 구속되지 않겠다”며 “합의에 따라 중지했던 모든 군사적 조치를 즉시 회복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로 정부가 2018년 체결한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일부를 정지한 지 딱 하루 만이다.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의 재가로 이뤄진 해당 조치는 북한 도발 징후에 대한 공중 감시·정찰 활동 강화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과의 무력충돌까지 대비해야 할 상황으로 번졌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는 조치 하나가 무력화되면서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북한의 위성 발사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 소집해 군사대비태세를 점검했다. 적이 도발한다면 ‘즉각, 강력히, 끝까지 응징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문제는 과거보다 나은 안전보장책이 제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 정부 누구도 ‘핵’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는 북한과의 전면전을 언급하진 않는다. 결국,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고 나면 보복한다는 말을 과거보다 ‘단호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남북대립 상황에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책은 ‘국제 공조’로 충돌을 억지하는 것 정도다. 윤석열 정부 역시 북한의 모든 미사일 발사는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문제는 남북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유엔이나 국제사회가 얼마나 정부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이스라엘-하마스 간 분쟁에서 유엔은 한계를 보였다.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면 유엔은 사실상 기능을 멈춘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 중국과의 물자 교류는 유엔을 통한 문제 해결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사회의 작동원리를 이용해 남북 충돌을 막는다는 전략도 점차 불투명해지고 있다. 본래 양극체제 속 힘의 균형은 일시적 평화를 만든다. 과거 냉전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심화된 미·중 갈등은 양국으로부터 각각 비호를 받는 남북의 직접적 대립을 억제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개 대륙에서 치러지고 있는 전쟁이 미·중 경쟁 상황을 ‘숨 고르기’ 상태로 전환시키고 있다. 실제로 미·중은 표면적으로 모두 ‘신냉전’에 반대한다. 결국 대립과 협력의 임계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남과 북만 덩그러니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9·19 남북군사합의 폐기, 수순인가 오판인가
시작은 지난 11월 21일,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였다. 정부는 즉각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일부를 정지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정부 조치는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제1조 제3항에 맞춰져 있었다. 이는 북한 도발 징후에 대한 공중 감시·정찰 활동의 복원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9·19 남북 군사합의의 대표적 문제점이기도 하다.
합의의 효력 정지는 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다만 그로 인한 결과는 모든 국민이 나눠 진다. 이 때문에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사실관계만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는 9·19 남북 군사합의 폐기와 교환됐다. 그렇다면 두 사안이 등가 교환물인지가 중요하다. 9·19 남북 군사합의의 정식명칭은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합의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다.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 상태 완화’다.
정부가 정지한 제1조 제3항의 구체적 내용은 “2018년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비행기 글라이더 등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지역은 40㎞, 서부지역은 20㎞를 적용해 비행을 금지한다. 헬리콥터 등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 무인기는 동부지역은 15㎞, 서부지역은 10㎞다. 마지막으로 기구는 25㎞를 적용한다.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비행금지를 선언한 9·19 군사합의의 상관관계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다수의 전문가는 “논리적으로 보면, 직접적 연관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쉽게 말해, A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B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와 직접 맞물리는 대응은 별도로 준비 중이다. 우리 군은 오는 11월 30일, 첫 번째 독자 정찰위성 발사를 예고한 상태다.
사실, 정부가 밝힌 두 사안의 연결고리는 따로 있다. 허태근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이날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는)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하는 북한의 모든 미사일 발사를 금지한 유엔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며, 우리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발행위”라고 비판했다.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불러오는 구조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C 국방 관련 전문가는 “애초에 9·19 군사합의는 정전협정을 준수하기 위한 군비통제 수단으로 유엔군사령부(유엔사), 한미연합사 모두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던 사안”이라며 “핵·미사일 고도화와 관련한 유엔안보리 제재와 한반도에서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충돌을 방지하는 9·19 군사합의를 동일 선상에 놓으면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것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와 9·19 남북군사합의 폐기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9·19 남북군사합의를 각각의 조항을 떠나 ‘충돌의 방지’라는 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북한의 행보가 합의를 폐기 수순으로 끌고 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남북 모두 이미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대북관계를 군사적 측면과 안보적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오직 ‘정찰’, ‘훈련’ 등의 군사적 측면만 보는 것”이라며 “북한이 정찰위성을 쐈으니 우리도 군사분계선에 무인기 등을 띄워 정찰하겠다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9·19 군사합의 폐기가 정해진 수순이냐, 정치적 판단이냐는 향후 대응 측면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정부가 합의 폐기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봤다면 충분한 대비가 됐을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반면, 이번 결정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정치적 결단이었다면 발생 가능한 문제의 대책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9·19 군사합의 폐기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냐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합의 폐기 이후, 무엇이 바뀌나
합의 폐기 이후 정부는 그토록 원했던 군사분계선 영역에서의 정찰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다만 한국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북한이 군사분계선의 동부지역 40㎞, 서부지역 20㎞ 내에서 비행체를 활용한 정찰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 이때 정부의 대응이 주목받는다. 합의 폐기 전에는 ‘9·19 군사합의 준수’를 명분으로 북한을 규탄할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규칙·합의를 어긴 북한에 대한 비판을 국제사회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선제적 합의 정지로 어려워졌다. 양 교수는 “군사분계선, 완충지대 정찰은 미국 위성의 도움을 받아 합의 위반을 피하면서도 가능했다”며 “결국 앞으로 북한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자유롭게 정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만 열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로운 정찰은 이명박 정부 때처럼 연쇄적 무력도발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정찰위성 대 정찰위성 구도가 군사적 도발과 맞대응으로 확장되는 식이다. 이미 북한은 “군사분계선(MDL) 지역에 보다 강력한 무력과 신형군사 장비들을 전진 배치할 것”이라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밝혔다. 조 위원은 “제일 첫 번째 조치는 감시초소(GP) 재구축과 병력 투입”이라며 “우발적 충돌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 셈”이라고 말했다. 또 9·19 남북군사합의 제1조 제2항, 제3조 등으로 묶어둔 해상 충돌 가능성이 우려된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설치한 평화수역 문제”라며 “해당 지역에서의 훈련이나 무장진입을 상호 못 하게 했는데 향후 이곳에서 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과거처럼 군, 민간인 희생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력충돌이 인명피해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없는 한국은 핵을 제외한 모든 수단에서 북한을 압도해야 한다. 다음 수순인 군비경쟁의 시작이다. 이 경우 문제는 한 가지다. 전부 세금이라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미 기록적인 세수 ‘펑크’가 계속해서 지적되는 상황이다. 정부가 어디서 군비경쟁에 필요한 추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어떤 전력을 확보해도 핵을 뛰어넘는 비대칭 전력은 없다는 점 역시 고민을 키운다. A 전문가는 “대체 대북전략이 뭔지 모르겠다”며 “핵을 가진 상대에게 강력히, 끝까지 응징하겠다고만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더욱 큰 문제는 남북대립 격화가 북한의 핵 고도화를 제어할 외교적·경제적 수단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 탈피다. 북한을 향한 정치적 압박, 외교적 고립, 경제적 제재, 군사적 확장억제를 말해 온 정부는 스스로 기대효과를 낮추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대외정세의 변화, 남북 충돌 막아줄까
북한 정찰위성 발생 직전 가장 큰 외교 이벤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였다. 특히 지난 11월 15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며 양국 관계의 방향성이 주목받았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렸던 첫 번째 정상회담 때보다 양국의 관계는 더욱 나빠져 있었다. 올해 2월, 미국 영공(영토와 영해의 상공)에서 발생한 이른바 ‘중국 정찰풍선 사태’는 양국의 무력충돌 가능성을 높였다. 미국은 F-22 전투기를 이용해 정찰풍선을 격추했다. 이에 중국이 ‘민간 무인 비행선’임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발리 정상회담을 계기로 약속한 ‘책임 있는 경쟁’이 대결과 대립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경쟁에 방점이 찍힐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결과는 미·중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군사적 충돌로 가는 것을 막는 ‘관리된 경쟁’으로 모아졌다. 미·중관계의 물꼬를 튼 것은 외부 변수였다. 핵심은 미국이 유럽,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에 이어 중국과의 충돌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김 교수는 “한반도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우크라이나나 이스라엘처럼 물자만 지원하고 빠질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며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이 개입하는 상황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로 과거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사건도 한미동맹이 없어서 발생한 일들이 아니었다.
대북 억지 전력으로 활용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남북관계가 경색됐을 때 북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했다. 크게 안보를 ‘힘에 의한 평화’, ‘외교에 의한 평화’로 나눈다면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도 대북전략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중관계 개선 여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끝낸 시진핑 중국 주석은 일본 기시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이어갔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한·중 정상회담은 개최되지 않았다.
이러한 대외정세의 변화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핵을 더욱 고도화한다는 것이다. 남북대립이 격화되면 중국은 북한을 제어하는 수단이 아닌 배경이 된다. 유엔 안보리 제재 역시 더욱 무력화된다. 9·19 남북군사합의가 종료된 후에도 당장 무력충돌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찰위성 발사 등에 대해 항의할 근거가 사라진 상황에서 불필요한 도발 대신 정해진 수순대로 핵 고도화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남북의 국지전 가능성이다. 힘의 균형은 평화를 만든다. 그러나 이는 경쟁하는 두 패권국의 개입이 가능한 범위에서다. 남북의 단발적 무력충돌까지 미·중이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충돌이 발생하면 전선에 서는 것은 서울 용산 집무실에 있는 ‘높은 사람들’이 아니다. 대화를 통한 예방·억지를 강조하는 것은 정책결정권자가 직접 전쟁에 나설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역사적으로 남북이 대립하면 북한이 주도권을 잡고, 대화와 교류를 하면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 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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