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그녀는 자연이 그렇게 하듯 포식자를 제거했다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11. 2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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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은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히는 것이다. 숲과 어울리지 않았던 엄마의 가방은 결국 떠나 버렸고, 카야만 덩그러니 언니 오빠들과 남게 된다. 그마저도 하나둘씩 떠나면서 그녀는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

"카야가 비틀대면 언제나 습지가 붙잡아 주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아픔은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는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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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생태학자로 보낸 저자가 일흔에 발표한 첫소설
델리아 오언스 (1949~)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은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한 슬픔이 얹히는 것이다. 숲과 어울리지 않았던 엄마의 가방은 결국 떠나 버렸고, 카야만 덩그러니 언니 오빠들과 남게 된다. 그마저도 하나둘씩 떠나면서 그녀는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검고 고운 진흙 덩어리'에 묻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누가 쓸 수 있을까. 아마 '늪'을 잘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명문장일 것이다.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은 '생태소설'이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혹은 밀물과 썰물까지 동일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그녀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세상에 없던 유형의 미학을 지닌 소설이다. 늪지에 버려진 소녀 카야는 자연 속에서 자연 자체로 살아간다.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그녀를 품어주는 존재는 '늪'뿐이다. 늪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다음 문장을 보자.

"카야가 비틀대면 언제나 습지가 붙잡아 주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아픔은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는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네 잡화점을 하는 흑인 부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사랑에 눈을 뜨게 한 테이트가 그들이다. 하지만 학업을 위해 테이트가 마을을 떠나면서 카야는 큰 상처를 입는다. 그때 체이스라는 건달이 나타나 그녀를 위로하지만 그는 오로지 카야를 유희 대상으로 본다. 체이스는 포식자처럼 그녀를 유린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체이스가 죽은 채 발견된다. 카야가 살인범으로 몰리고 재판이 시작된다. 다행히 카야는 변호사 톰의 도움으로 무죄 평결을 받는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카야는 진범이었다. 그녀는 자연계의 한 생물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듯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이상하게 카야는 살인자 같지 않다. 그냥 살기 위해 할 일을 한 자연스러운 생명체 같다. 이것이 이 소설이 달성한 경지다.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한 학자였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인 아프리카 오지 등에서 수십 년 동안 자연과 함께 살았던 오언스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펴낸 첫 소설이다.

소설은 어머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 스타 리스 위더스푼이 추천작으로 소개하면서 입소문이 나 뉴욕타임스와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올리비아 뉴먼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소설은 자연과 합체가 돼본 오언스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었다.

무죄 평결을 받은 카야는 돌아오자마자 갈매기들에게 달려간다. 그녀가 원한 건 하나였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사는 것.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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