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니 혼은 왜 같은 그림을 두 개씩 그렸을까
더블링·페어링 통해 ‘정체성’ 표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정체성은 작가들이 끊임없이 탐구한 주제 중 하나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그 안에서 인식하는 나의 정체성은 무한한 예술 세계의 출발점이 됐다. 미국 현대 미술가 로니 혼도 마찬가지다.
불면의 밤, 그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드로잉에는 독특한 문양에 따뜻한 색감을 담았다. 닮았지만, 조금씩 다른 한 쌍의 형태들. 때론 나란히 붙어 있고, 때론 조금 떨어져 있는 이 그림들이 8점씩 짝을 이뤘다.
로니 혼의 ‘프릭 앤 프랙스(Frick and Fracks)’ 수채화 연작 15점.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로니 혼의 다섯 번째 개인전(12월 31일까지)에선 작가의 예술 세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만나게 한다. 전시 제목이면서 작품명이기도 한 ‘프릭 앤 프랙스’는 상당히 독특하다. 이 이름에서 작가의 숨은 의도를 만나게 된다.
이 이름은 스위스의 코미디 아이스 스케이팅 듀오의 예명에서 따왔다. 베르너 그뢰블리와 한스 마우흐 듀오는 1930년대 처음 협업, 미국에서 아이스쇼 투어를 열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프릭 앤 프랙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둘 간의 구분이 불가능한 관계를 칭하는 은어로 사용됐다.
여덟 점의 수채화 드로잉으로 구성된 ‘프릭 앤 프랙스’를 관통하는 두 개의 주제는 ‘더블링’(이중성)과 ‘페어링’(쌍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사진부터 조각, 드로잉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온 특징이기도 하다.
전시에 나온 드로잉은 2018년부터 2023년 사이에 제작됐다. 그림은 단순하다. 눈에 확 띄는 추상의 도형은 은은한 색상으로 입혀졌다. 8점이 한 세트가 됐고, 두 점씩 닮은 꼴을 하고 있다. 8점의 배치 순서도 작가가 정했다. 때문에 작품을 구매를 할 때에도 ‘최대한 작가가 맞춰 배치한 그대로 각자의 공간에 배치되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을 고려해 안내를 하고 있다는 게 갤러리 측 설명이다. 서명도 8점 중 딱 한 점에만 했다.
닮아 보이지만 약간의 변주를 더해 달라진 도형 같은 그의 작품을 마주하며 관람객들은 카드 게임을 하듯 짝을 맞춘다. 작품에 그려진 도형의 의도가 궁금해지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추상의 도형을 그린 이유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관람객이 이 작품을 언제, 어느 위치에서, 어떤 배열로 보느냐,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며 “멀리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을 쓰면서 자세하게 보면 더 재밌는 감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니 혼의 작업은 ‘하나’의 본성을 거부한다. 사람도, 사물도, 장소도 ‘하나의 특성’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하는 이중성 작업의 핵심이다. 성 정체성을 스스로 정한 작가의 삶은 그의 작업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 셈이다.
로니 혼에게 ‘더블링’은 작품 간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방법이면서,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게 갤러리 측 설명이다. 앞서 ‘유 아 더 웨더(You are the Weather)’ 작업에선 같은 모델을 동일한 방법으로 촬영한 1995년 사진과 2010년 사진을 나란히 전시했다. 2010년 국제갤러리에서 연 전시에선 ‘이자벨 위페르의 초상’을 통해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다양한 표정을 몇 초 간격으로 찍은 연작을 선보였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표정을 통해 저마다 다른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정체성의 작업은 결국 ‘관계 맺기’로 나아간다. 그는 사람과 사물, 자연이 맺는 관계를 자신의 작업에 담는다. 아이슬란드 빙하를 모티브로 한 ‘유리 조각 연작’은 그룹 방탄소년단(BTS) RM이 소장하고 있어 유명세를 탔다. 아이슬란드에서 지구와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 작업이다. 로니 혼의 유리 작품 ‘열 개의 액체 사건’(2010)은 현재 호암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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