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살며 생각하며]
향을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사람의 도리와 삶의 이치는
시대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아
우주로 삶의 지경 넓히는 지금
근본으로 돌아가야 길 안 잃어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드는데 무언가 툭 발등으로 떨어졌다. 뭘까? 주워 보니 한 펜화가가 그린 풍경화였다. 진품은 아니고 인쇄된 2호 크기의 작품이었는데, 웅숭깊은 계곡에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는 정자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너럭바위를 발치에 거느린 정자는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고 꼭 있어야 할 것만 갖춘 그 작은 정자 주변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담장처럼 자리하고 있고, 제법 그늘도 깊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기실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풍경보다는 건물이었다. 문화재들을 찾아 세밀화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인데, 일종의 기록화인 셈이었다.
그는 현존하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허물어져 사라진 문화재도 그린다고 했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복원되고 재현되는 문화재들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는데, 그만큼 선조들의 미적 수준과 자연을 해석하고 향유하는 감각이 뛰어났음을 보여주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만 적어도 50만 번에서 80만 번의 선을 그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는 선 하나 긋는 일에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고, 기계처럼, 관성처럼 긋지 않으려 조심한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그 일은 구도(求道)의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0.03㎜의 선들은 그의 손끝을 따라 더해지고, 더해지고, 더해지다 경계를 이루고, 면을 채우고, 그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기사를 통해 알았다. 더 살아도 좋았을 나이인데. 폐허가 되고 무너진 문화재를 복원하듯 자신의 건강도 잘 건사해 회복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소멸이기에 앞서 가족과 우리 사회의 손실이기도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위치와 의미가 크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자신이 그려 온 사물과 자연 속에 숨어들어 하나의 바람으로, 한 마리의 새로 떠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 때문에 그를 만났다. 그의 작업실은 바다와 접한 어느 도시의 변방에 있었다.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갈아타고 그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 웃음이 맑고도 푸졌다. 작업실 안에는 세월의 더께가 또 다른 외피로 내려앉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 도장을 찍듯 하나씩 가져온 기념품들이었다. 그것들은 유랑의 흔적이었고, 작품의 대상이었고, 그리고 자신이 숨을 곳이었다.
그가 그랬다. 향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 냄새가 밴다고. 그 촌철살인 같은 경구가 식곤증으로 자꾸만 느른하게 풀리던 나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되감아 주었다.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그 이야기는 어느 광고 문구였고, 카피라이터는 그였다. 그때부터 향 싼 종이와 생선을 싼 종이는 되돌이표에 걸린 후렴구처럼 내내 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기실 향기와 냄새와 악취는 시간이 빚어낸 존재의 증거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삶을 어떻게 운용해 왔는지, 삶의 양태에 따라 사람에게서 나는 체취는 저마다 다르다. 살아온 시간들이 축적되고 응집돼 풍기는 그런 삶의 체취 말이다. 과연 나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삶이 지향하는 목적지로 견인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그 욕망이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세상을 소비하는 이도 있다. 그 삶의 에너지와 기척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내 삶도 온전히 운용할 수 없는데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다니, 두려울 일이다.
향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 비린내가 밴다는 그의 말의 원전은 공자가어의 육본이다. 논어 교우편에 실리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향기를 맡지 못하니, 그 향기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비린내가 전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니, 또한 그 냄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주사(朱沙)를 가지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을 가지고 있으면 검어지게 되니, 군자는 반드시 함께 있는 자를 삼가야 한다.’
향기와 냄새에 동화되고 물이 들게 된다는 말이 두렵지 않은가.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할 일이다. 자신만 아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과, 주변을 돌아보며 챙길 줄 아는 사람 중 나는 후자를 만나고 싶고 후자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신하고 우주로 삶의 지경을 넓히는 시대에 무슨 공자냐고 하겠지만, 그럴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사람의 도리와 삶의 이치는 시대가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세상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각박해지고 가상과 현실이 뒤섞일수록 다시 고전에서 사람의 도리를 따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향 싼 종이와 생선 싼 종이. 코끝에서 냄새가 뒤섞인다. 내게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도 진중해야겠다. 그 풍경화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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