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18. 깔딱고개, 그곳에서 인생의 이치를 배운다.

최동열 2023. 11. 2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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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 두타산 문간재 고갯길 정상. 여기서부터 사원터까지 이어지는 계곡미가 압권이다.

■힘겹지만, 신세계를 만나는 기회의 사다리

산에서 고개는 변곡점이다.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그간의 고행을 위로하듯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린다. 발아래 경관을 굽어보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고,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힘을 내 새로운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고개는 한편으로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고빗길이기도 하다. 올라서면 보고 싶었던 풍광을 만나 성취감에 젖는 기회가 부여되지만, 중간에 돌아서면 기회는 사라진다. 따라서 고갯길은 필연적으로 힘겨움을 동반한다. 기회와 성취는 결코 편하고 수월하게 주어지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고갯길의 기회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와도 무척이나 닮았다.

우리 땅, 우리 산에는 고개가 참으로 많다. 눈 돌리면 산을 마주해야 하는 나라이다 보니 산을 넘어가야 다른 고장,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산을 넘는 길은 대개 고개로 통했다. 인적·물적 교류의 통로가 바로 고개인 것이다. 그래서 령(嶺), 재, 현(峴), 치(峙) 등 고개를 뜻하는 이름이 전국 곳곳에 널려있다.

▲ 백두대간 곤신봉 정상의 이국적 풍광.

그런데 등산하다 보면 그런 고갯길 가운데서도 ‘깔딱고개’라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을 유난히 많이 조우하게 된다.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근교의 야트막한 야산에는 없고, 대개 대간이나 정맥 등 이름 깨나 하는 깊은 산, 높은 고갯길에 터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숨이 턱밑에 차오르고, 발목에는 쇠뭉치를 매단 듯 발걸음이 천근만근인 급경사 가풀막의 다른 이름으로 통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할딱고개’ 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산 등산에서는 깔딱고개가 거의 마지막 관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첫 들머리부터 급경사 비탈길이 버티고 있는 곳도 있지만, 그런 곳을 깔딱고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에서 온 힘을 짜내듯 올라가야 하는 곳이라야 진정 깔딱고개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학의 등을 연상케 하는 1km 이상의 기나긴 오르막을 하염없이 짐승처럼 기다시피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고, 거리는 수백m에 불과하지만, 성벽처럼 막아선 가풀막을 타고 넘듯 올라서야 할 때도 있다.

동해안에서 대표적인 곳을 찾으라면, 강릉 소금강 계곡∼오대산 노인봉 구간의 가풀막과 경북 울진 덕구온천 계곡∼응봉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고행의 비탈길을 우선 꼽을 수 있겠다. 오대산국립공원 노인봉(해발 1338m)은 진고개 정상(해발 960m)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편도 산행거리가 3.9km에 불과하고 표고차도 적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소금강 계곡에서 등산을 시작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전체 이동거리가 편도 10.2km에 달하는 데다 소금강 계곡 끝단의 낙영폭포∼노인봉 정상을 오르는 마지막 관문에는 1km 이상의 기나긴 깔딱고개 비탈길이 버티고 있다.

경북 울진의 덕구온천계곡∼응봉산(해발 998.5m) 구간도 계곡 끝단에서 정상에 오르는 마지막 고비가 숨이 턱에 차는 긴 비탈길이다. 그래서 덕구온천 초입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정상에 오른 뒤 깔딱고개를 거쳐 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이용하는 등산객들이 더 많다.

▲ 설악산 봉정암 구간의 마지막 관문인 깔딱고개. 이 고개를 올라서면 적멸보궁 봉정암과 설악 암릉미의 백미인 용아장성, 공룡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설악산 봉정암, 정선 가리왕산, 동해·삼척 두타산, 지리산 법계사, 제천 금수산∼망덕봉, 속리산 문장대 등등. 이름 있는 명산은 거의 어김없이 깔딱고개 같은 급경사 비탈길 관문을 통과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깔딱고개를 넘어 고지 능선에 다다르면, 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그네를 반긴다. 일망무제, 산그리메가 파도치듯 용틀임하는 진경이 펼쳐지는가 하면, 동해안 대간 능선에서는 바다와 산을 동시에 굽어보는 유토피아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극복보다는 즐기는 자세가 최선

▲ 속리산 문장대로 오르기 직전에 만나는 할딱고개.

그런데 산행 중 온몸이 땀에 젖은 상태에서 1km 이상씩 이어지는 깔딱고개를 맞닥뜨리게 되면, “아∼저곳을 어떻게 오르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라서면 신세계를 목도하고, 환호성이 절로 나온다는 점에서 깔딱고개는 희망과 기대를 동반하는 험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세상사에서 힘겹고 어려운 일을 무사히 마쳤을 때 더 커지는 희열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은 유명 산의 고개들이 대부분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지만, 깔딱고개는 한편으로 그 이름이 시사하듯 여전히 많은 위험을 수반하는 곳이다. 비탈길 경사가 급하다 보니 떨어지는 낙석에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눈 쌓인 겨울산이나 우중 산행 시에는 미끄럼 사고 등의 위험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산에서 예기치 않은 변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 또한 깔딱고개다.

고산의 깔딱고개는 표고차가 크다는 점에서 계절의 변화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고개 아래 계곡은 푸른 신록이 막 돋아나는데, 고개 위는 떠나는 겨울의 잔설을 헤쳐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을산의 진객인 단풍 또한 깔딱고개 능선에서는 아래위가 전혀 다른 두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다. 두둥실 흰 구름도 어느 날에는 깔딱고개 중턱에 걸려 등산객과 함께 숨을 고르기도 한다.

▲ 계룡산 동학사 자연능선 코스의 급경사 오르막길.

그러하기에 고갯길을 오를 때는 우공이 산을 옮기듯(愚公移山) 느긋한 마음으로 비탈을 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급하게 오르고 싶다고 해서 경보를 하듯, 빨리 오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거북이걸음으로 뚜벅뚜벅, 쉬엄쉬엄 올라도 종국에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시간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니 가끔은 숲속의 나뭇등걸도 안아보고, 새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고, 스쳐 가는 바람에 뺨을 들이밀면서 유유자적 오르는 것이 가장 수월하게 고갯길을 오르는 방법이 된다. 고갯길을 급하게 올라야 하고, 넘어서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쉬어가면서 즐기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 최선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깔딱고개라는 고비에서 포기하지 않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지름길은 결국 끈기와 여유다. 노력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사뿐 아니라 등산에서도 정석인 것이다. 어차피 산에서 고갯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이기 때문에 깔딱고개 또한 그곳을 벗어나서 산을 오르거나 넘어가는 더 쉬운 길은 없다. 그런 깔딱고개 한두 개 오르지 않는다면 어찌 등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세상살이에서 그런 고갯길 한두 개, 고비 몇 군데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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