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상인가’...로젠한 실험도 못 밝힌 정신의학의 민낯
정신의 ‘온전함’과 ‘이상함’ 판단기준 의문
정신의학 판도 바꾼 실험의 맹점 고발
1969년 2월, 한 남성이 정신병원을 찾았다. 자신을 데이비드 루리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안에서 둔탁한 소음이 나는데 항상 남성의 목소리”라며 환청 증상을 호소했다. 그의 설명을 조용히 듣던 의사는 그에게 조현정동 장애 진단을 내리고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
루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환청도 없었다. 그는 스탠퍼드대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이 스스로 꾸며낸 가상의 인물이자 악명 높은 로젠한 실험의 첫 번째 가짜 환자였다.
로젠한은 약 50년 전 정신의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을 진행했다. 자신을 포함해 정신질환 병력이 없던 8명을 미국 각지의 정신병원에 보내 의사가 ‘나이롱 환자’를 가려낼 수 있는 지를 본 것.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시도였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정신병원 모두 이들을 정신질환자로 오진한 것. 이들은 평균 20여일 동안 정신병동에서 지내야 했다.
로젠한의 실험 결과는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 내 수십 개의 정신병원이 문을 닫았고, 정신의학계의 진단 체계와 치료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었다.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질문인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파장이 커질수록 로젠한의 명성도 올라갔다.
로젠한 실험 결과는 인권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여기는 정신의학계에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 의학계는 결국 동성애를 정신질환 편람의 개정판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로젠한 실험이 가져다준 폭발적인 반응과 달리 그 이면엔 추악한 민낯이 있었다. 논문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날조된 가짜 환자이 있었던 것.
미국의 베테랑 기자 출신이자 신간 ‘가짜 환자, 로젠한 실험 미스터리’의 저자인 수재나 캐헐런은 로젠한 실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다.
빌 언더우드라는 이름의 가짜 환자는 로젠한에게 제대로 된 사전 설명 없이 정신병동에 수감되면서 과도한 약물 치료에 그대로 노출됐고, 심지어 전기 충격요법의 문턱까지 갔다. 때문에 그는 수감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로젠한은 실험에 앞서 빌 부부에게 그를 언제든 퇴원시킬 수 있는 인신 보호영장이 준비돼 있다고 안심시켰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빌은 수감 기간 동안 그 어떤 안전도 보장받지 못했다. 로젠한은 이러한 사실을 논문에서 모두 삭제했다.
또 다른 가짜 환자 해리 랜도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평소에 느꼈던 불안감이나 소외감이 해소되면서 정신병원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학 체계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를 목표로 했던 로젠한은 그의 기록을 아예 누락했다.
당시 로젠한 실험의 이 같은 맹점을 지적한 이들이 일부 있었다. 그럼에도 로젠한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컬럼비아 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로버트 스피처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피처는 당시 정신의학의 헌법과도 같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3판의 담당자로서 정신의학 체계를 완전히 개조시키고 싶었다. 인간 행동 이면의 동기를 탐구한다는 프로이트 주의를 몰아내고,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진단 기준을 마련해 정신의학을 다른 의학 분야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당시 그의 목표였다.
그런 그에게 로젠한 실험은 기회였다. 로젠한 실험이야 말로 지금까지의 정신의학은 모두 잘못됐고, 전체적인 정신의학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로젠한 실험의 맹점을 알면서도 의학계가 이를 공개하지 못하고 쉬쉬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의학이 과학의 언어에 따르지 않고, 힘도 없음을 드러내는 방증이다. 현재까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은 제5판까지 개정됐지만, 아직도 정신의학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릴 과학적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현실은 결국 정신의학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온전한 정신과 정신 이상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정신의학은 우리의 성격, 믿음, 도덕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이는 곧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법관 역할을 한다. 때문에 정신의학의 행보를 맹목적으로 믿기 보단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의심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캐헐런은 25세 때 앓은 자가면역 뇌염을 조현병으로 오진받아 불필요한 정신질환 치료를 받은 피해자다. 신체 질환을 정신 질환으로 판단한 의사의 오진 탓에 그는 정신병동으로 이송될 뻔했다.
이현정 기자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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