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은 바게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주식(酒食)탐구생활㊱]
종종 먹던 음식인데, 딱히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메뉴도 아닌데 갑자기 영혼이 사로잡히게 되는 경험.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있음 직한 그 순간. 푸드 에디터이자 번역가 정연주(37)에게는 파리를 여행 중이던 2019년 어느 날이 그랬다. 르 꼬르동 블루 숙명 아카데미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외국 요리책 수십 권을 번역해 온 그에게 프랑스 음식은 비교적 친숙한 편이었다. 파리 여행을 앞두고서 그가 꼼꼼히 준비했던 것은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파는 곳들과 직접 맛을 봐야겠다고 저장해 두었던 맛집 리스트였다. 몇 달을 다녀도 다 먹어보지 못할 먹거리를 추리고 추려 빠듯한 일정에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짜 넣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던 여행 나흘째. 그를 충격에 빠뜨린 건 하고많은 먹거리 중 바게트였다. 그것도 식료품점에서 크림소스에 졸인 닭 간과 당근 라페를 샀더니 서비스로 끼워준 바게트였다.
“종이봉투나 바구니에 바게트가 담겨 있으면 멋스러워 보이잖아요. 평소처럼 사진 몇 장 찍고 삐죽이 튀어나온 바게트 껍질 부분을 대충 뜯어서 입에 넣어 씹는데 나도 모르게 ‘헉’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자극적이거나 화려한 어떤 것도 없는, 담백하고 평범한 빵조각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입안에서 겹겹이 화려한 층이 펼쳐지는데 고소하고 야들야들하면서 쫄깃하고, 또 바삭하게 감칠맛이 나며 혀에 감기는 것이 머릿속이 멍해지더라고요. 제 식탐 인생에서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고 그게 다른 것도 아닌 바게트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죠.”
남은 여행 기간은 자연히 바게트를 어디서 사 먹을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동네마다 바게트를 파는 빵집이 있는 파리에서 맛있는 바게트를 사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게마다 저마다 바게트 맛의 개성이 있었고 1~2유로면 살 수 있어 값도 쌌다. 그전에 한국에서 만난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에선 맛있는 바게트를 사 먹기가 너무 힘들다”고 푸념처럼 늘어놓던 말들이 이해됐다. 문제는 여행에서 돌아와서였다. 그 맛을 잊지 못해 바게트 투어에 나섰다. 수년간 쌓아왔던 인맥을 동원해 바게트 잘 만드는 집을 찾았고 프랑스 사람들이 빵을 만든다는 서울과 부산의 웬만한 빵집은 다 뒤졌다. 물론 예전에 비해 맛있는 바게트를 파는 곳이 늘어났지만 뭔가가 허전했다.
“검색하고 마음먹고 전철을 타고 사러 가서 구한 바게트는 물론 맛있고 귀하죠. 그런데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맘속에 허전함이 커졌어요. 그 실체가 뭔지 들여다봤더니 일상성이더라고요. 소위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 원하는 바게트를 살 수 있는 그런 환경 말이죠. 결국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바게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이론과 기술을 점검하며 야무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부실한 체력이었다. 의욕만으로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가 장렬히 전사하길 수 차례. 따지고 보면 요리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손으로 머랭을 치다가 머랭 반죽 속으로 빠져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많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현장에서 요리하는 대신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다 보니 요리가 얼마나 엄청난 체력 소모를 요하는지 체감할 기회가 적었다. 기계나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일단 몸으로 어느 정도는 익숙해지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그는 운동 계획을 먼저 세웠다. 30년 이상 숨쉬기 운동이 고작이었던, 계단 오르는 것도 힘들어했던 그는 근력운동과 달리기를 시작했다. 운동과 담쌓고 지내던 그를 아침마다 일으켜 세운 것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바게트였다. 그렇게 바게트를 향한 집념으로 운동을 시작한 지 1년. 두려움과 자괴감은 의욕으로 조심스럽게 살아났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작은 빵을 목표로 빵 반죽을 시작했다. 처음엔 인스턴트 이스트를 사용하다 내친김에 천연 발효종을 키우는 데도 성공했다. 그동안 요리, 제빵, 제과 관련 서적을 40권 가까이 번역하면서 쌓인 지식 덕분에 이론적으로도 탄탄히 무장된 상태였다.
수없이 많은 반죽을 치대고 성형하며 바게트 굽기를 시작한 지 3년. 그럭저럭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바게트가 되지 못한 채 애매한 빵이 만들어진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맛있는 바게트를 구워 파는 빵집들이 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자신의 오븐에서 아름다운 바게트를 척척 완성시키고 싶은 목표를 향한 여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도 바게트 덕분에 제 인생은 엄청나게 달라졌어요. 바게트의 맛을 ‘깨닫고’ 나서 후천적으로 빵 근육을 얻게 됐다는 사실이죠. 할머니가 되어서도 바게트를 반죽할 체력이 있고 먹을 수 있으려면 빵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을 쉴 수 없어요.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요.”
그는 얼마 전 바게트를 향한 최근 몇 년간의 분투기를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세미콜론)라는 책으로 담아냈다. 책 뒤편에 무조건 바게트를 사온 후에 이 책을 펼치라는 김민철 작가의 친절한 ‘경고문’을 무시했다가 급기야 책을 덮고 바게트를 사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중단하고 바게트를 사러 나선 것은 1990년대 말 구효서 작가의 <오남리 이야기>를 읽던 때 이후 두 번째였다.)
그는 현재 주방 오븐을 벗어나 매주 남편, 아이와 함께 캠핑하러 다니며 요리를 한다. 처음엔 고기를 굽는 일반적인 캠핑 요리를 시도하다 이제는 화목난로를 싣고 다니며 빵까지 굽는다. 날 것의 환경, 통제되지 않는 불로 뭔가를 뚝딱 만들어야 그게 진짜 실력이라는 생각에서 무모하게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캠핑장에서 바게트를 구울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캠핑장에서의 요리 이야기를 뉴스레터 ‘캠핑차캉스 푸드라이프’를 매주 발간하고 있는 그는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음식은 늘 풍성하게 우리 삶을 채워주는 것 같다”면서 “그 추억을 나누는 순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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