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도 없던 시절 덜컥 영어논문… ‘동양자수’ 이젠 서양서 더 관심”[M 인터뷰]
세계 첫 자수박사·직물史 대가
1965년 국내 수공예학원 열고
美 등서 자수교육에 평생 바쳐
日전시·이란박람회 등 참가해
‘한국 자수’ 예술로 인정받기도
평생 수집한 작품 숙대에 기증
12월 말까지 ‘20주년 특별전’
책으로만 보고 배운 나와 달리
후배들 ‘실물’보고 공부했으면
인터뷰 =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1969년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미국을 향할 때부터 한국의 딸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흉잡힐 일은 하지 말자. 한국인으로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자. 그 마음을 50여 년 동안 지키며 살았습니다.”
자수 예술가이자 직물 역사가인 정영양(87) 박사. 그의 음성에는 겸허와 자부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서양에서 비주류 예술이었던 자수 공예를 학문으로 처음 정립하고 그 위상을 높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국 뉴욕에 살며 자신이 설립한 설원재단을 통해 미 전역에서 자수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주변 사람들이 하도 젊어 보인다고 해서 “87이 아니라 78로 산다”고 한다는 그는 현재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이사,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조지워싱턴대 뮤지엄, 워싱턴 텍스타일 뮤지엄 이사 역할도 하고 있다.
정 박사는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동안 서울에 있었다. 숙명여대 정영양 자수박물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10월 16일∼12월 29일)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세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 한 번은 문화일보 인터뷰실에서였다.
―정영양 자수박물관이 20주년을 맞았다. 감회가 어떤가.
“감회가 클 수밖에 없다. 내가 한국에서 자수를 공부할 때는 실물을 볼 수 없어서 책으로만 배웠다. 후배들이 현물을 직접 보고 직조 과정, 색, 문양 등을 참고해서 제대로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평생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자수 작품을)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밖에 있던 것들이 돌아온 것, 그게 중요하다.”
―20주년 특별전은 마음에 드나.
“욕심을 내자면 한이 없다. 디스플레이보다 전시 취지가 중요하다. ‘동아시아 예복’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하이테크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고유의 예법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또 한국과 중국, 일본의 풍속 차이를 예복을 통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단오 때 다섯 가지 독충을 수놓은 흉배(胸背)를 황제가 아랫사람들에게 선물했다. 그런 곤충에게 물리지 않게 한다는 뜻이었다.”
―정영양 박물관에는 고대 중국 희귀 유물이 있어서 세계 각국의 연구가들이 방문한다던데.
“이번 전시 작품에도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거울 뒤에 새겨진 견사자수가 있다. 자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수법을 볼 수 있다.”
그는 직물 역사 권위자다. 1976년 ‘자수의 기원 및 중국, 일본, 한국에서 자수의 역사적 발전(The Origins and Historical Development of Embroidery in China, Japan, and Korea)’이라는 논문으로 미국 뉴욕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최초의 ‘자수 박사’라던데.
“당시엔 자수를 연구하는 학문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겁 없이 논문 타이틀을 그렇게 잡았다. 그런 짓을 해 놓고 역사적 근거와 현황을 찾으러 중국, 베트남 등을 다니며 무척 고생했다. 자수의 원 고장 페르시아 지역과 이집트, 몽골, 스페인, 멕시코까지 가서 역사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전거가 없으니 하나하나 내가 써야 했다.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가 이전에 작가다. 실과 바늘의 예술인 자수를 처음 접한 계기는.(그의 작품은 1968년 청와대가 10폭 자수 무궁화병풍 ‘통일’, 잉어도 ‘단결’ 등을 소장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여자는 재주가 있어야 좋은 곳에 시집을 가니 자수를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과 골무, 반짇고리가 장난감이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살다가 6·25전쟁 때 고향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때 어깨너머로 언니들에게서 자수를 배웠다.”
―자수학원을 시작한 게 언제인가.
“1965년이었다. 문교부 인가를 받은 직업학교로 최초라고 하더라. 이름이 국제수공예학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내가 기특한 게 ‘국제’라는 이름을 넣었던 거다.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은 거다.”
―일본 전시 수익금을 그 나라 신체장애인들에게 기부했다던데.
“1967년에 일본수공예협회 초청으로 2주일간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 자수를 처음으로 일본에서 전시한 것인데, 주최 측에서 입장료를 받았다며 나에게 주더라. 신체장애인들에게 자수 재료를 사 주라고 돌려줬다. 당시 우리나라도, 일본도 다 가난했던 시절이다. 우리나라 자수를 소개하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기부금 같은 입장료를 들고 오게 하고 싶지 않더라. 한국 여성의 자존심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국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한복을 입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입장료를 기부한 것이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돼 NHK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웃음).”
―1969년엔 이란에서 전시를 했다. 당시 국왕인 팔레비가 전시장에 찾아와 정 박사에게 악수를 청하는 사진이 인상적이더라.
“이란에서 국제박람회가 있었을 때 한국관에 참여했다. 당시 학원 학생들의 직업 진로에 도움이 되고자 간 것인데, 굉장히 환대를 받았다. 국왕과 총리, 왕족들이 다 와서 봤고 이란 국영 TV에서 인터뷰를 했다. 자수의 본고장인 페르시아에서 우리 자수를 선보인 셈이다. 명주실로 수를 놓은 것에 이란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더라. 상품을 넘어 작품으로 여겨줬다.”
―그 직후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간 것은 어째서인가.
“일본, 이란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다녀오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더 배우고 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을 직원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갔다. 현지 갤러리에서 내 전시를 본 뉴욕대 측에서 장학생으로 초청을 해줬다.”
테헤란 국립 박물관은 1969년 구입한 정영양 작가의 학 병풍을 최근 전시했다.
―언어 장벽은 없었나.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 음식을 시킬 줄 몰라서 굶을 때도 많았다. 영어를 배우는 학교에 갔더니 세계 각국에서 온 자기 나름대로 한가락 한다는 유명한 사람이 많이 있더라. 내가 나이가 가장 많으니 점심시간에 모두 나를 따라왔다. 식당에서 메뉴를 봐도 무슨 말인 줄 모르니 그냥 ‘햄버거’ 했다. 그랬더니 모두 ‘미 투(Me too)’라고 하더라.”
그는 대학원 조교를 하며 자수 강의를 할 때, 그 내용을 슬라이드로 다 만들어서 밤새 읽으며 익혔다. 그 시절 일화.
“학생들이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내가 영어가 서툴러 제대로 앉으라고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니 내가 화난 줄 알고 발을 슬슬 내리더라, 하하.”
―그 후로 쭉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힘들지 않나.
“물론 고단하다. 그러나 못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그렇게 산다.”
―지금까지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학문 자체가 없던 자수 역사를 공부하며 내가 하나하나 만들어가던 시기인 1973년에 메트(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큐레이터 진 메일리(Jean Maily)가 나를 초청해 자수 컬렉션 정리를 부탁했다. 너무 좋았다. 컬렉션을 정리하며 독학으로 매일매일 공부하니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게 바탕이 돼서 나중에 메트에서 강의도 하게 됐다. 1978년에 동양 자수를 다룬 책(‘The Art of Oriental Embroidery’)을 펴내고 미국 전역을 돌며 강의한 것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호주 등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열어 초청해 준 것도 기뻤다.” 세계 첫 자수 연구서인 ‘The Art Of Oriental Embroidery’는 1981 년 뉴욕 메트에서 그 해의 미술 서적으로 선정했다. 그의 2005년 저서 (‘Silken Threads’)는 조지워싱턴대가 교재로 쓰고 있다. 규방 공예를 학문적으로 규명한 연구가일 뿐만 아니라 현장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미국 사회에서 동양계를 대표하는 문화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건희 여사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정 박사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게 있던데.
“그런 걸 어디서 봤나? 지난 4월 한국 정부와 미국 스미스소니언 재단 간에 있었던 양해각서 체결 때 재단 이사회가 한국에서 중요한 분이 온다며 나를 대표로 참석하게 했다. 그분은 재단에 한국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나를 보고 좋아하더라. 그다음 미국에 왔을 때(국립합창단이 뉴욕에서 ‘훈민정음’을 공연했던 지난 9월)도 만났다. (김 여사가)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 대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런 것이 해외에 사는 한국 사람의 사기를 올려주는 거다.”
―한국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실감하나.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코리아가 어디 있냐, 홍콩 옆이냐’고 묻더라. 너무 속상해서 내가 밤에 한복을 입고 뉴욕대 공원을 걸어 다녔다. 이래도 한국을 모르겠냐, 라는 심정이었다. 지금은 한국을 모르면 미국의 문화인이 아니다. 우리 한국인도 그에 맞게 글로벌 시야를 지녀야 한다.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주 해외에 나가서 보고 들으며 마음을 열어야 한다.”
■ 젊게 사는 비결은…
“정원 가꾸기 등 통해 체력 유지… 무엇보다 ‘자수사랑’이 건강 비법”
정영양 박사에게 물었다. 이토록 젊어 보이고 활력이 넘치는 비결은 뭐냐. 그는 많이 들었던 질문인지 바로 답을 줬다. “건강한 체질을 타고났을 거예요. 또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수에만 갇혀 바보처럼 내 일만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요. 뉴욕 교외(Lachmont)에 사니까 집에 정원을 두고 나무와 꽃을 가꾸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는 미국에 오래 살았으나, 한국 문화계에도 오랫동안 교우해 온 이들이 있다. 그처럼 ‘80대 청년’인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 대표적이다. 김 이사장은 “정 박사가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동양 공예를 서양에 널리 알린 공로는 엄청난 것”이라며 “지금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정 박사가 이번에 서울에 왔을 때 만찬 모임을 주선한 박동선 파킹턴인터내셔널 회장은 40여 년 지기다. 정 박사는 197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게이트의 주인공인 박 회장이 출중한 외모와 균형 잡힌 인품으로 워싱턴에서 인종을 넘어 인기가 높았다고 되돌아봤다. 박 회장은 “정 박사와 나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잘되기만을 빌었다는 점에서 같은 세대로서의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정 박사는 공예 후학들의 활로를 걱정했다. 세계가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드는 우리 공예인이 많은데, 판로를 활성화하지 못해 생활이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 같은 선배들이 책임져야 하는데, 내가 여기 없으니 분통이 터집니다. 관계 기관과 작가들이 함께 애써야 하겠지요. 수출로 활로를 찾으려면 그 시장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야 할 거예요.”
그는 미국에 돌아간 뒤에 이메일을 통해 2024년 한·미 공예 행사를 위해 전시, 워크숍, 세미나 등을 준비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 왔다. 그 끝에 이렇게 적었다. “제 인터뷰 기사를 본 후학들이 한 자수연구가의 행적과 함께 실과 바늘의 힘을 올바르게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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