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1저자다] ④"화학 연구에서 시간은 '금'…지원 끊기면 도태"
"식품값부터 시작해 모든 비용이 오르고 있는데 연구비는 오히려 깎는다니 놀랐습니다."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시앙 류 박사후연구원은 전이금속 촉매반응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장석복 기초과학연구원(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 단장을 찾아 2019년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서의 연구 생활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지난 8월 느닷없이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달 17일 IBS 정회민 박사후연구원, 시앙 류 박사후연구원, 이우석 박사과정생을 대전 IBS KAIST캠퍼스에서 만났다. 이들은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젊은 연구자들이지만 이미 권위있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네이처 카탈리시스', '네이처 케미스트리' 등에 각각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전도유망하다.
그러나 내년 R&D 예산 삭감 소식이 전해지며 국내 기초연구가 쇠퇴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들은 "화학 연구에서의 시간은 중요하다"며 "지원이 끊기거나 중단돼 속도감 있게 변화하는 연구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게 될까봐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이들이 속한 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은 새로운 촉매반응을 개발하고 그 메커니즘을 규명한다. 촉매는 물질과 물질이 결합하는 화학반응의 속도를 조절하는 물질로 이리듐, 로듐, 철, 니켈 등의 금속을 주로 활용한다. 이렇게 발견한 촉매 반응은 새 화학 원료 및 신약 개발 등에 응용된다. 취미도 흥미도 '화학'인 연구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기초과학 연구에는 꾸준한 관심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Q. 화학을 좋아하면서 화학 분야에서 일하는 '덕업일치(취미와 생업이 일치함을 뜻하는 신조어)' 연구자라고 들었다.
시앙 류 박사후연구원(이하 류)=내 취미는 화학이다. 좋아하는 것과 일이 겹친다는 건 큰 행운이다.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막 마치고 다양한 곳에서 제안이 왔지만 이 분야에서 유명한 한국IBS의 장석복 교수 연구실을 선택했다. 이곳에서 연구하게 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우석 박사과정생(이하 이)=중학생 시절 화학 선생님 덕분에 화학을 열심히 공부하게 됐다. 당시 화학 올림피아드에도 출전했는데 이때 유기화학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겼고, 실력이 쟁쟁한 학생들이 모여있는 과학고에서도 유기화학을 나만의 장점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아, 그런데 취미는 온라인 게임이다.
정회민 박사후연구원(이하 정)=내 취미도 화학인 것 같다. 학부 시절 시뮬레이션에 기반해 화학반응을 설명하고 모델링하는 연구를 배웠는데, 이런 화학 시뮬레이션이 재미있다. 그래도 최근 인기있는 드라마는 모두 봤다. 진짜다.
Q. 아무리 좋아하는 연구여도 힘들 때가 있지 않나. 최근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인한 파장은.
류=R&D 예산 삭감 소식에 좀 놀랐다. 사실 식료품을 포함해 모든 물가가 오르고 있지 않나. 연구비도 올라야할 것 같은데 오히려 줄인다는 게 놀라웠다. 연구비 삭감은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에서 알 수 있듯 기초과학은 국가 발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도 최근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초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이=화학에서는 실험이 중요하다보니 재료비에서 제약이 생긴 부분이 있다. 교수님들도 학생 인건비를 줄일 순 없으니 예산을 줄인다면 우선 재료비를 줄이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까지는 넘치는 건 아니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을만큼 실험 재료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당장 내년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정=기초과학은 지원을 많이 할수록 실험의 질이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교수님들도 실험의 인프라에 대해 많이 강조한다. 실험을 해야 하는데 특정 재료나 기구가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 있으면 그 순간 가장 무력감을 느낀다.
IBS는 기초과학연구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특별히 설립한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IBS에 소속돼 있을 때는 아무래도 더 보호받는 듯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 어딘가에서 자리 잡을 것을 생각하면 (인프라 등의) 문제가 더 와닿는다.
Q. 실험 인프라에 대한 지원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특히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여러 물질을 합쳤다가 분리해보면서 화학반응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게 실험이다. 어떤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필요한 기구를 건물 1층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여건과 차를 타고 2시간 떨어진 다른 도시에 가야만 하는 여건은 확연히 다르다.
외국에 있는 실험 기기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나라에 해당 실험기가 있으면 '연구를 해볼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외국으로 가야 한다면 연구에 앞서 망설임이 더 커진다.
정=시료 문제도 있다. 법적으로 실험하는 데 사용이 규제된 물질이 있다. 외국에서 발표된 논문을 읽고 직접 실험을 해보려해도 해당 물질이 국내에서 여러 이유로 허용이 되지 않아 연구를 진행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최근 발표된 논문을 살펴보면 중국계 학자들이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 게재하는 좋은 논문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 연구단도 지금까지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지원이 중단되거나 꺾일까봐 두려움이 생긴다.
화학은 시간이 중요하다. 누가 더 빨리 새 화합물을 만드느냐를 두고 촉각을 다투는데 재료를 구하지 못하거나 실험기기가 없어 연구 과정에 남들보다 2~3단계가 더 소요된다면 점점 퇴보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연구계에서 밀려날까봐 걱정도 크다.
Q. 외국 출신 연구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류 연구원은 중국과 영국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왔다. 외국 연구자로서 한국의 연구 환경은 어떠한가.
류=박사 학위를 영국에서 취득했는데 영국과 한국의 연구 환경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이미 언급했듯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봐도 장 교수의 연구실에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다.
낯선 환경이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외국에서의 적응 과정을 통해 다른 환경과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익숙한 곳에만 있으면 배울 수 있는 게 적다.
연구실에서는 주로 영어를 쓰지만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에 있던 아내가 나를 위해 큰 결심을 하고 한국에 왔다. 학교에서 직원 가족에게 한국어 수업을 제공해주는데 아내는 이제 한글도 읽을 줄 안다. 12월에는 첫 아이도 태어난다.
정=10~20년 후에 다시 연구원이나 KAIST에 온다면 지금과는 풍경이 다를 수도 있다. 학부생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봐도 외국 학생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해외 연구자가 국내로 유입되는 기회를 잘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Q. 기초과학 연구자로서, 대중이 기초과학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면 좋겠나.
이=기초과학 분야의 연구 결과는 빛을 받기까지 40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처음 어떤 물질이나 반응이 발견됐을 때는 '이게 뭐야?'식의 반응을 얻기도 한다. 나중에 '이런 연구 결과가 있었다니!'하는 식이다. 메신저리보핵산(mRNA)이 한 예다. 주식으로 치면 잠재 가능성이 있는 '상장 전 주식'이라고 할까.
정=어떤 연구는 저평가받기도 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수 있다. 신기한 고분자 물질을 만들었지만 곧바로 '쓸모'를 찾기는 어려울 수 있지 않겠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목도가 달리지기도 하고, 진정 언제 빛을 발할지 모른다. 또 화학반응은 가끔 마법같은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초과학은 '재미있다', '신기하다'고 봐주시면 좋겠다.
이=기초과학은 어떤 현상의 원인에 집중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왜, 하필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찾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류=우리의 연구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건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 질문이다. 지금 현실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할지라도 미래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Q. 한국에서 첫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이 배출된다면 그곳은 IBS일 것이라는 말들이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정=역대 노벨상 수상자를 보면 30대 쯤 톡톡튀는 아이디어로 어떤 발견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잇는 후속연구를 하고, 점점 그 연구 결과의 명성이 높아지는 식이다. 교수님도 우리에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서 새로운 연구를 하라고 조언하신다. 그런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이, 류=노벨상은 몰라도, '정회민 리액션'은 나올 것이다. '뉴턴 법칙'처럼 어떤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현상을 명명하지 않나. 취미가 화학인 진정한 화학 연구자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대전=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