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복판의 K아트…한국 현대 미술에 쏠린 눈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 미국에서 최근 1년 사이 한국미술을 탐구하는 큰 전시회들이 전례없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9월 엘에이카운티뮤지엄(라크마)에서 미국 최초의 한국 근대미술 기획전 ‘사이의 공간’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올해 9~10월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전과 필라델피아미술관의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 채색화전 ‘생의 찬미’를 재구성한 샌디에이고미술관 순회전이 줄줄이 막을 올렸다. 이달 들어서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소장품 특집전과 애리조나대 투손 크리에이티브 사진센터의 한국현대사진전이 잇따라 시작됐다. 이런 흐름들이 케이(K)팝에 이어 문화한류의 새 주역으로 케이아트를 부각시킬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에서 예술집필자로 활동 중인 이한빛씨가 현지 주요 미술관들의 한국 전시를 살피고 참관기를 보내왔다.
“해피! 럭! 머니! 헬스!”(행복! 행운! 돈! 건강!)
여든을 바라보는 작가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관객들을 말랑하고 긴 막대로 마구 내리쳤다.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된 전시장. 여기저기서 ‘선생님, 여기요’란 뜻의 “서, 히어(Sir, here)!”란 요청이 쏟아진다. 작가의 죽비(竹篦)가 관객을 깨웠다.
지난 17일 오후 2시, 미국 뉴욕 맨해튼 구겐하임미술관 4층에선 이 미술관에서 두달째 열고 있는 기획전 ‘오직 젊음으로: 한국 실험미술 1960-1970년대’(Only the Young: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의 출품 작가 성능경(79)의 ‘신문읽기’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작가는 고국에서 수십여년간 퍼포먼스를 벌일 때마다 착용했던 예의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예술은 쉽고, 인생은 어렵다”는 주문을 읊었다. 국내 신문을 읽고 읽은 부분을 잘라내는 퍼포먼스가 뒤이어 진행됐다. 처음 퍼포먼스를 시작했을 땐 1970년대 군사독재시절 서슬 퍼렇던 언론검열에 맞서는 의미가 컸다. 작가는 말했다. “그 당시에는 그 행동만으로도 긴장해야 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
과거의 의례를 반복하는 건 기억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곡절 어린 역사에서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올가을 미국 동부 주요미술관들의 의제는 성능경의 퍼포먼스가 환기한 것처럼 ‘한국미술 기억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부터 근현대까지 한국미술사를 조명하는 큰 전시들이 전례 없이 잇따라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문은 뉴욕 구겐하임이 열었다. 지난 9월 첫날 개막한 한국 실험미술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6년 가까이 공동기획으로 준비해 지난 5월 서울에서 선보인 뒤 뉴욕으로 넘어왔다. 이어 10월20일에는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기획전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 미술’(The Shape of Time: Korean Art After 1989)이 개막해 관객들을 맞았다. 이달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배턴을 넘겨받았다. ‘계보: 메트의 한국 미술’(Lineages: Korean Art at the Met)이라는 주제로 한국실 개관 25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지난 7일 시작됐다.
모두 ‘한국미술’이지만 초점은 제각각이다. 구겐하임은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미술사에서 동떨어진 갈라파고스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모노크롬’으로 묶이며 비슷한 사조로 분류된 박서보, 하종현 작가 등의 단색조 그림 말고도 1960~70년대 격동의 시대와 호흡했던 ‘실험미술’이 한 축이었음을 강조하며 아방가르드 운동 맥락에서 주류미술사로의 편입을 꾀했다. 공동 기획자인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연구관은 “한국 청년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이 20세기 세계 전위 미술사의 층위를 풍부하게 한 점이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젊은 작가들의 젊은 생각은 50여년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날 것’의 야성이 살아있었다. 엘에이(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운드 아티스트 아드리앤은 구겐하임 전시를 보기 위해 일부러 뉴욕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감탄을 섞어 말했다. “대학 때 플럭서스 운동이나 아방가르드 사조를 공부하면서 한국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성능경의 퍼포먼스는 관객을 하나로 끌어들이고 호흡한다. 목소리의 울림과 떨림의 에너지, 물질이 아닌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읽혔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시간의 형태…’전은 세계화 이후의 동시대 한국미술에 집중한다. 신미경, 서도호, 박찬경, 정연두, 강서경, 이수경, 임민욱, 김주리, 함경아 등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28인의 한국작가 혹은 한국계 작가 작업을 통해 동시대 한국을 읽어내려 했다. 이념전쟁의 상처, 세대 간 갈등, 젠트리피케이션,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지만 차별적 시선을 내재화한 한국 사회의 모습은 비단 한반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소재는 한국적일지 모르나, 세계 어디서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대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미 글로벌아트씬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역량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 전시의 주요 포인트다. 특히 미술관 들머리에는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Eastern Deities Descended)란 제목이 붙은 신미경 작가의 거대한 비누 설치작품이 들어서 눈길을 끈다. 익숙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에서 커미션 형식으로 제작을 지원했다. 1928년 미술관 건립 당시 건물 지붕 아래 오른쪽 날개 박공(서양 고전 양식 건물의 입구 기둥 위쪽과 지붕 사이에 자리한 삼각형 벽체)에는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신과 위인을 새겨넣은 조각을, 왼쪽엔 동양문명을 상징하는 신상들의 조각을 올릴 계획이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양신은 완성되지 못하고 작은 모형만 전해져왔다. 신 작가는 미완의 동양신들을 비누조각으로 소환했다. 날마다 써서 녹아 없어지는 비누 소재는 동양 문화가 서양으로 넘어오면서 삭제되고 재맥락화 되는 과정과 은유적으로 닿아 있다.
전시를 기획한 우현수 부관장은 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시점이 한국 미술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지목한다. “해외여행 자유화를 기점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이 세대는)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마지막 세대이자, 새로운 민주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세대로 상당수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했다. 지금의 케이(K)컬처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이 여기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전시는 시선을 내부로 돌렸다. 한국실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12세기 고려시대 고려청자부터 재미작가 바이런 킴의 회화까지 광폭의 시간을 압축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이불 작가의 세라믹 작품이 한자리에 놓였는데, 천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 ‘한국의 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수업 준비를 위해 찾았다는 현지 대학생 클라라는 “넷플릭스로만 한국을 알고 있었는데, 전시를 보면서 일본이나 중국과 견줄 만한 문화 저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 미술 전시회가 미국에서 드물었던 건 아니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서부 지역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국 작가들의 전시회가 심심치 않게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 미술판의 핵심인 동부 미술관들에서 동시다발적인 대형 전시들을 통해 한국미술을 조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휘경 구겐하임 큐레이터는 “한국미술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우리 한 기관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한국문화에 대한 전반적 관심이 커진 데 따른 영향이 아닐까 싶다”고 짚었다.
지난 17일 퍼포먼스를 마친 성능경은 이렇게 눙치며 웃었다. “작품 하나로 내 예술에 대해 다 전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말만으로, 행동만으로 타자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이야. 접점을 만들 수밖에.” 그의 말대로, 올해 가을은 한국미술이 접점을 만드는 계절이다.
글 ·사진 이한빛 재미 예술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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