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엄마보다 위로를 더 잘해
"엄마, 나 오늘 새벽 2시에나 잘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말인가 싶어 들어봤더니 졸업 기념으로 롤링페이퍼(여러 사람이 편지지를 돌려 가며 편지를 쓰는 것)를 하기로 했는데 도안을 다 그리지 못했고 논설문 쓰기 숙제도 남았다는 거다. 아이는 저녁 밥을 먹기 전부터 아이패드로 도안을 그리고 있었다. 반 친구들 투표를 통해 도안이 결정되는데 꼭 뽑히고 싶다면서 열심히 그렸다. 그러다가 반 친구들 얼굴을 하나하나 캐리커처하면 더 좋겠다면서 신나했다.
뭐든 저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할 때 지어지는 특유의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리다가 에너지가 떨어지면 간식을 찾거나 잠시 쉬거나 하며 25명의 얼굴을 완성했을 시간이 밤 12시경. 손이 얼얼하다면서도 논설문 쓰기 숙제까지 해야하는지라 잠자는 시간은 더 늦춰졌다. 그냥 자라고 해도 해야한단다. 애만 두고 야멸차게 먼저 자기도 어려워 나도 책을 읽는데 눈꺼풀이 슬슬 내려온다. 그즈음 숙제가 끝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방과 후. 평소라면 아이는 일하고 있는 내 방으로 와서 인사를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한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느낌이 싸하다.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싶어 거실로 나와보니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다. "왜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제야 아이 얼굴에 울음빛이 가득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내가 디자인한 도안이 안 뽑혔어. 뽑힌 애 그림 별론데... 내가 더 잘했는데..."
"아, 그랬구나."
어떻게 위로를 해주면 아이가 결과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 수많은 육아책을 읽었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아이가 하는 말을 충분히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런 말들을 건넸다.
"엄마라면 네 걸 뽑았을 텐데... 선정이 안 된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네가 열심히 했고 할 때 재밌게 했으면 된 거야. 떨어져도 네 실력은 쌓였잖아."
"재밌지만은 않았어.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리고 엄마, 떨어진 것도 속상하지만 내 옆자리에 앉은 애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자기 머리 스타일 바꾼 지가 언제인데 왜 이렇게 그렸냐고 그러잖아. 아니 내가 걔 머리 스타일 바꾼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겠어? 그리고 그걸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또 뭐야."
아, 나라도 이건 완전 속상했을 일이다. 반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간과 노력이 더 많이 들어도 캐리커처를 선택했던 것인데... 이런 반응을 들을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다. 친구들에게 노력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아이는 내내 속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이 반 아이들이 투표로 뽑은 도안을 그린 아이를 도와주라고 했다니... 떨어진 것도 속상한데 속이 어지간히 상한 눈치였다. "아 그랬구나, 정말 속상했겠네." 아이는 나에게 기대하는 위로를 받지 못했는지 언니 방에 가 있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언니 방에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 물으니 그렇단다. 지독한 언니 사랑.
언니 방에게 게임을 하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모드로 돌아왔다. 나는 "네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을 거라면서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한 마디를 더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 기분은 나아진 것으로 보이니까. 남편이 퇴근 후 눈치 없이 2호에게 그 일을 물어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 롤링페이퍼 그거 어떻게 됐어? 네거 뽑혔어?"
"아니... 안 뽑혔어."
나는 남편에게 더 묻지 말라고 눈빛으로 눈치를 주는데 보지를 못한다. 그러더니 하는 말.
"아, 아쉽네. 괜찮아. 친구들이 보는 눈이 없구나. 얘들이 예술에 대해 뭘 알겠어."
"(큭큭 웃으며) 그렇지, 아빠! 위로는 엄마보다 아빠가 더 잘하네. 엄마는 그냥 내 말을 듣고 그렇구나... 이런 말만 했는데..."
남편 말을 듣고 재치있게 말해준다고 생각한 찰나에 훅 들어오는 아이 말을 듣고 갑자기 너무너무너무*1000000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나도 노력했다고. 앞서 적은 그런 말들을 해주지 않았냐고. 그렇게 말하면 엄마 몹시 서운하다고. 아이는 그제야 뭔가 눈치를 챈 듯 "알았어"라고 했다.
어쩜 이렇게 받아들이는 게 다를까 싶어서 서운하고 또 서운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웃고 있는 아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내가 고심하고 고르고 골라 한 말들이 아이에게는 그렇고 그런 말들이었구나 싶어서 나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서 속상했다(아, 쓰고 나니 2호랑 나랑은 왜 이렇게 똑같을까). 속상한 마음을 계속 티를 낼 수가 없어서 말을 삼가고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끄고 누웠다. 할 수 있는 게 잠이나 자는 거였다.
[이런 엄마 이야기] 남편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자랄 때 어머니에게 다정한 말을 들으면서 자란 것도 아니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왜 그렇게 다정해? 왜 그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해줘?"라고. 남편이 말했어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못 받았으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나는 '받은 게 없어서 주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이게 난데... 이런 모드였는데... 남편은 '받은 게 없어서 오히려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니. 남편이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일은 쉽지 않은 거니까요. 아니 너무 어려운 것이라서요.
그리고 저도 압니다. 남편이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요. "친구들이 보는 눈이 없구나"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자기 마음을 아빠가 꼭 알아봐 준다고 느낀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아빠는 위로를 잘한다고 말했겠지요. 그 마음 저도 압니다. 저도 남편에게 참 많이 위로 받았거든요. 남편은 육아책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책이라곤 단 한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육아책을 비롯 수백권의 책을 읽은 저보다 나을 때가 많았습니다. 쓰고 보니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드네요.
그런데 남편이 저에게 이렇게 물어요. "2호에게 인정 받고 싶어?" 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나 인정 받고 싶은가 봐. 근데 쟨 나를 늘 부족한 엄마로 만들어. 그러면 내가 정말 그렇게 부족한 엄마인가 싶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속상해." 인정욕구는 회사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질문에 생각이 많아집니다.
아이에게 인정받고 싶은 이런 엄마라니요. 저는 왜 이런 마음이 생긴 걸까요? 그러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친정엄마를 인정하지 않을까, 라고. 엄마가 하는 일은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엄마도 저처럼 '내가 정말 그렇게 부족한 엄마인가 싶고 그럴 때마다 속상' 하셨을까요. 엄마의 오답노트가 왜 자꾸 친정엄마를 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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