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카, 엄카 말고 생카?…우리끼리 즐기는 ‘나의 최애’ 생일 파티 [ESC]
케이팝 팬덤 문화 ‘생카’
아이돌은 참석 않지만 팬이 카페 빌려 직접 준비하는 축하 공간
굿즈·사진으로 장식…한 사람 향한 애정으로 시공간 가득 채워
외국팬 포함 팬덤 연결·공유…“응원하는 이들과 추억 모으는 일”
“법카, 엄카까지는 아는데, 생카는 또 무슨 카드죠?”
‘생카’를 아느냐는 질문에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호진(45)씨는 이렇게 되물으며 “혹시 ‘생색내는 신용카드’의 줄임말인 것 아니냐”고 했다. ‘생카’는 ‘생일 카페’의 줄임말이다. 아이돌이라고는 뉴스에 나오는 비티에스(BTS)와 블랙핑크 정도 아는 김씨 같은 ‘아저씨’는 잘 모르는 개념이겠지만, 생카가 뜬 지는 좀 오래됐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생카는 이제 케이팝(K-POP) 세계에선 널리 퍼진 행사다.
사랑하는 연예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생카는 팬덤 문화에서 꽤 큰 조각이다. 21세기 문화살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팬들은 함께 모여 독특하고도 기발한 방식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케이팝의 ‘엔진’으로도 불리는 팬덤 문화 속 생카의 세계로 들어가 봤다.
이름난 생카, 수백~수천명 몰려
생카는 한마디로 생일을 맞은 아이돌 멤버를 위한 생일 파티다. 그러나 놀라지 말자. 정작 생일을 맞은 주인공은 생일 파티에 오지 않는다. 무슨 ‘홍철 없는 홍철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이다.
생카는 철저히 ‘팬들의, 팬들에 의한, 팬들을 위한’ 이벤트다. 아이돌 팬들이 카페를 빌려 주인공의 사진과 엠디(MD, 머천다이즈에서 나온 말로 ‘굿즈’라고도 함)로 공간을 꾸미고 포토부스, 러키 드로(행운의 제비뽑기) 같은 이벤트를 열면서 ‘나의 최애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진과 몇가지 기념품이 있는 카페일 뿐인데 팬들이 오겠냐고? 실제로 이름난 생카에는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의 팬들이 몰려든다. 기획사에서 직접 기획한 생카는 인원을 수백명 단위로 제한하기도 한다. 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카를 찾는 외국인 팬도 굉장히 많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주변의 한 카페에서 열린 세븐틴 멤버 ‘디에잇’(The8)의 생카에서 만난 독일 교환학생 쌍둥이 남매 핀 수에센구스(23)와 안토니아 수에센구스(23)는 열정적인 생카 순례자들이다. 쌍둥이 남매는 각각 중앙대와 숙명여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하고 있는 안토니아는 세븐틴과 펜타곤의 팬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두 그룹의 생카만 가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좋아하는 엔시티(NCT) 멤버의 생카도 간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는 핀 역시 세븐틴을 가장 좋아하지만, 다른 아이돌의 생카를 찾는 것을 즐긴다.
안토니아는 “좋아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지다. 각각 다른 카페들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즐겁다. 한국 생카에는 아이돌을 테마로 한 귀여운 굿즈들이 많다”며 “잘 살펴보면 서울 시내에서 각각 다른 생카에서 받은 대여섯개의 컵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들을 쉽게 볼 것이다. (생카 투어는) 추억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케이팝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어 케이팝 아이돌의 생카가 독일에서도 열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고 한다. 핀은 “생카가 한국에서 시작됐고 이제 점차 외국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이라, 독일에서 열리는 생카의 규모나 화려함은 한국 것과 비교하긴 어렵다”고 했다.
“콘서트·팬미팅보다 부담 적은 놀이터”
일본인 곤도 사라(22)는 연세대 한국어어학당에서 6개월 프로그램을 마치고 곧 귀국한다. 그는 에프티(FT)아일랜드 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2016년께 케이팝에 입문하게 된 ‘2세대 한류팬’이다. 한국에서 지낸 지난 반년 동안 5차례 정도 생카를 찾았다. 일본에서 거주지인 기후현에서 도쿄까지 야간버스를 타고 어머니와 한국 아이돌 콘서트를 찾아다녔던 소녀는 이제 엑스(옛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카 등 각종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려주는 소식통이 됐다. 곤도는 “팬 활동은 힘들었던 경험을 잊게 해주는 소중한 창구였다”며 “이걸 통해 어머니와의 관계 역시 너무나 좋아졌다”고 말했다.
엑스에서 ‘ㅅㅇㄹ’로 활동하는 일본인 사오리 역시 어머니와 씨엔블루 콘서트를 함께 다녔던 2세대 한류팬이다. 이제는 에스에프(SF)9의 열혈 팬이기도 한 그는 한달에 한번꼴로 한국을 찾는다. 뮤지컬과 팬미팅을 비롯해 생카를 찾는 기쁨을 위해서다.
외국의 팬들은 케이팝을 매개로 한 국제적 친교 활동도 즐긴다. 안토니아는 “케이팝은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인기가 많아서, 개인적으로도 케이팝으로 알게 된 외국 친구들이 정말 많다. 이들에게 생카 소식 등도 알리며 온라인을 통해 소통한다”고 말했다. 곤도와 사오리 역시 인도·타이 등 다양한 나라 친구들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소통한다. 사오리는 지난 19일 서울 선릉역 주변에서 열린 한 생카에서 미국·대만·중국 친구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팬들을 한자리로 모으는 생카의 매력은 무엇일까. 많은 팬들은 생카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를 꼽는다. 생카는 묘한 시공간이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생일을 맞은 아이돌의 사진이나 굿즈가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가 닿는 모든 곳에 생일을 맞은 아이돌 혹은 그가 속한 그룹의 근황이 있다. 게다가 한 사람을 향한 애정만으로 시간과 공간이 가득 찬다. 어찌 보면 ‘해리 포터’ 속 마법사들에게만 보이는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팬덤을 공유하는 이들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플랫폼이다.
서울 신구초등학교 6학년 김수연(12)양은 “최애가 태어난 바로 그 시기, 최애를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일 축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이곳을 찾는 것 같다”며 “나도 좋지만,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다른 그룹 멤버들의 생카에도 간다. (생카는) 어린 우리들에게 콘서트·팬미팅보다는 훨씬 더 부담이 적은 놀이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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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자체 제작 캐릭터가 상품으로
팬들을 묶어주고, 감동하게 하는 플랫폼이지만, 생카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하는 생명체와도 닮았다. 작은 공간에서 몇몇 선구적인 팬들이 시작했던 생카는 이제 비즈니스 영역으로 일부 편입될 만큼 커졌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던 캐릭터가 대량 생산되는 상품이 되기도 한다. 차우진 문화평론가는 “생카 문화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며 “콘서트·팬미팅 등 모든 행사가 중지된 가운데 소규모로 간단히 열 수 있는 생카는 많이 인기를 얻었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온라인이 아니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오프라인 수요가 압도적으로 늘었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면서 기획사에서도 앨범·포토카드를 비롯해 아이돌 인형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생카와 기획사의 팝업스토어도 이런 수요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발간된 책 ‘2023 콘텐츠가 전부다’를 보면, 4대 기획사에서 눈에 띄게 매출이 늘어난 분야는 엠디 분야다. 제이와이피의 경우 엠디 매출 규모가 1년 새 5배나 성장했다.
생카가 정확히 언제 출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략 2016년이나 2017년 사이에 나타났다는 추측만이 떠돈다. 기획사가 아닌 팬이 직접 이벤트를 기획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었다. 생카를 기획하는 이들은 대부분 ‘홈마’(홈페이지 마스터의 줄임말)다. 자신이 직접 고성능 카메라로 찍은 고화질 사진이나 동영상을 공유하는 홈마는 최애 아이돌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활동한다.
과거 고화질 사진에 머물렀던 열성 팬의 창작물은 최근에는 직접 디자인하거나 기획한 굿즈로 진화하고 있다. 아이돌 닮은 동물을 캐릭터로 만든 인형도 인기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뽀바투’, 에스파 멤버 윈터의 ‘직직이’ 등은 팬들의 손에서 태어난 인형들이다. 엔시티 멤버 마크리를 닮은 치타 인형 ‘치타리’의 엑스 계정 팔로어는 무려 7만8천명이다.
에스에프9 커뮤니티에서는 리더 영빈의 홈마인 ‘샤인비’가 기획하고 디자이너와 협업해 만든 영빈 캐릭터 ‘토빈’(토끼+영빈)이 유명하다. 2017년부터 영빈의 생카를 열어온 그는 카페 예약부터 상품 기획까지 전 과정을 총괄한다. 샤인비는 “시작한 계기는 간단했다. 좋아하는 멤버와 관련된 이벤트가 하나라도 더 열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인기의 척도는 팬들이 여는 이벤트 수와도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영빈의 팬이 되기 전에는 카메라를 잡아본 적이 없었던 샤인비는 어느새 7년째 생카를 여는 홈마가 됐다. 생카의 규모는 서울 명동 한 호텔 카페의 1·2층을 전부 쓸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홈마로서의 고비도 많았지만, 자신의 사진을 기다려주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응원의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샤인비는 돌아봤다.
케이팝 팬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상당수는 ‘연결’을 통해 기쁨과 소속감을 얻는다. 엑스의 팔로어 5천명이 넘는 에스에프9 팬덤 계정 운영자 ‘더마’(derma)는 신속하고 간결하게 그룹 멤버들의 소식을 올린다. 외국인 팔로어도 꽤 된다. 그는 “소식이 안 올라오거나 활동이 없으면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서로의 팬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만나면 함께 모여 포토카드(포카)를 들고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그걸 다시 온라인에 올리는 식이다. 서로가 서로의 활동의 연료가 되는 이들은 함께할수록 행복하고 뜨겁다.
샤인비는 “독특하긴 한데, 케이팝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함께 응원하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일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뭐랄까 예전 품앗이와 비슷하다고 할까? ‘일행’ 친구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은숙 라이프콘텐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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