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구십 세
"올해 아버지 구순인 거, 알고 있지?"
친정엄마의 귀띔에 기절하게 놀란 사람은 다행히 나뿐이 아니었다. 오빠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우리 남매는 아버지가 올해 구순인 것을 생신 일주일 전에야 간신히 알았다. 서양식 나이 계산법에 익숙한 우리는 아버지가 34년생이시니까 내년에 구순인 줄 알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구순은 자식들이 아무도 모른 채 넘어갈 뻔했다. 우리는 서둘러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 예약을 했고, 가족들의 오붓한 축하 속에 아버지의 구순 파티를 괜찮게 보낼 수 있었다. 생일파티라는 말에 메뉴에 없는 미역국을 준비해주신 음식점 직원들은 아버지가 무려 구순이라는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날렵한 청바지와 재킷을 입고 오신 아버지의 외모는 아무리 보아도 구십세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시에 구순을 맞이한 바람에 구순 기념 여행이나 다른 축하 이벤트는 당연히 준비하지 못했다. 늦가을의 바쁜 일정들을 얼추 넘겼다 싶은 즈음이 되어서 아버지와 강화도에 새우구이나 먹으러 다녀올까 하고 연락을 드렸더니 '안그래도 한번 놀러가보려던 참'이었다며 난데없는 액셀 파일을 즉시 보내셨다. 2박3일의 철원 여행 계획표가 완벽하게 짜여 있었고 숙소와 관광택시와 민간인 통제구역 출입 예약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엄마와 두분이 철원에 나들이 다녀오실 생각이었는데 딸도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하셨다. 내가 모시고 가는 여행이 아니라 두분의 여행에 얹혀 가는 셈이 되었다.
아버지의 꼼꼼한 여행 계획표에 의하면 일산에서 철원까지 한번에 가는 시외버스가 없어서,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야 하는 복잡한 방식이었다. 내가 운전해서 모시고 다녀오면 딱 좋을 것인데, 내 스케줄 상 최대 1박2일만 가능했다.
"아버지, 제가 마지막 날은 다른 일이 있어서요. 일정을 1박2일로 줄여서 다녀오시는건 어떨까요? 제 차로 다니면 이동시간이 많이 줄어들 테니 1박2일이나 2박3일이나 차이가 없을 거예요."
"아니 됐다. 예약 다 해놨는데 이제 와서 바꾸려면 오히려 복잡하다. 너는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그냥 하루만 함께 다니는 걸로 하자."
아버지는 일정을 조절해서 함께 다니자는 제안을 쿨하게 거절했다. 두분이 배낭을 메고 버스를 서너번 갈아타는 것이 고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원래 그렇게 잘 다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셨다. 나는 걱정하는 척하던 것도 빠르게 집어치웠다. 실은 '알아서 할테니 신경쓸거 없다'는 아버지의 말처럼 반가운 것이 없었고, 원래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나은 여행자였다.
계획을 이미 다 짜놓으셨으니 나는 아무 고민이나 연구 없이 운전병만을 자처하며 쭐레쭐레 따라나섰는데, 계획표에 있는 일정이 그렇게 강행군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철원 주상절리길이 편도 3.6킬로미터라고 하길래 평소 걷기에는 자신이 있으니 혼자라면 왕복도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오르막과 내리막이 꽤 많은 길이었다. 왕복은커녕 편도조차 꽤 힘들었다. 아버지도 생각보다 힘들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중간에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시는게 어떻겠냐고 권하는 말이 듣기 싫어서 쌩하니 앞질러 가버리셨다. 여러번 쉬어가며 간신히 완주한 주상절리길 끄트머리의 휴식공간에는 아버지처럼 이 길을 과소평가하고 쉽사리 도전했던 노년의 어른들이 여러 명 넋이 빠져 앉아있었는데, 비슷한 몰골로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하는 후행들에게 웃음 섞인 격려를 보내주었다. "고생했어! 이제 다 왔다고!"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렇게 완주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그 길이 어쩌면 아버지의 인생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건강한 노년을 내가 물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건강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하늘에 맡길 일이다. 내가 배워야할 것은 구십세에도 스스로 일상을 가꾸어나가는 아버지의 한결같은 자세일 것이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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