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라이브 카페 가수 되려다 동생 권유로 쓴 소설
영화판 기웃댔지만 ‘입봉’ 실패
엉뚱한 상상 멋대로 쓴 ‘고래’
어린시절 판타지가 남긴 소설
뒤늦게 감독데뷔, 알 수 없는 인생
소설을 처음 쓰게 된 것은 순전히 동생의 권유 때문이었다.
90년대 내내, 영화판을 기웃대며 감독의 기회를 엿보다 끝내 데뷔를 못 하고 지쳐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밀레니엄도 지나가고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고, 더 이상 버틸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하고 하고 있던 차에 한 친구가 권유한 것은 엉뚱하게도 라이브 카페의 가수였다.
당시,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뜬금없이 서울이나 경기도 근교의 길목마다 라이브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70, 80년대 통기타가수들이 갑자기 소환되어 귀한 대접을 받던 시기였다. 전국의 강가나 물 맑은 계곡마다 카페가 들어서다 보니 가수 품귀 현상이 빚어졌고 왕년에 기타 좀 치고 팝송 좀 흥얼거리던 쌍팔년도의 한량들이 새로 기타를 고쳐 메고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나 정도의 기타 실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내 친구는 주장했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기타 코드 세 개만 알고 머리만 좀 기르면 누구나 돈을 받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거였다. 실제로 젊은 시절 기타 좀 튕기다 일거리가 없어 당구와 술로 세월을 보내던 한 선배도 갑자기 바쁘신 몸이 되어 하루에 예닐곱 개의 업소를 뛰며 월 천만원의 소득을 올린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카페에서 노래를 하면 그곳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대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잡아본 기타를 잡고 코드를 외우며 열심히 노래를 연습했다. 기타는 친구가 ‘팝송대백과’와 ‘가요대백과’라는 두 권의 책과 함께 사다 준 거였다. 그렇게 마흔이 넘어 장래희망을 얼떨결에 영화감독에서 라이브 카페 가수로 바꾼 나는 열심히 코드를 외우며 옛날 노래들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동생이 방문했다. 그리고 갑자기 웬 기타냐며 물었고 연유를 듣고는 대번에 그 나이에 무슨 라이브 카페 가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럼 뭘 먹고 사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그때 한 말이 소설을 써보라는 거였다.
소설가라니! 나에게 그건 라이브 카페 가수보다 더 현실성이 없는 소리였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소설은 아무나 쓰나’였다. 실제로 나는 소설이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학창시절 소설가란 뭔가 엄청난 철학적 통찰과 체계적이고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 그리고 범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영성과 남다른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처럼 팝송이나 흥얼거리는 한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뒤, 얼떨결에 단편을 몇 편 써서 데뷔를 하고 또 이듬해 ‘고래’라는 장편을 써서 문학상도 받고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결국 친구의 권유보다는 동생의 권유를 따른 덕분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었으면 한동안 라이브 카페 가수로 살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펼쳐진 인생행로가 더 나았을까? 가보지 않은 길이니 알 수 없다.
나의 첫 책인 ‘고래’는 초고를 쓰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아무 영화사에서도 연락이 없었고 인터넷도 끊기고 만날 사람도 없다 보니 시간은 많았다. 당시엔 내가 쓴 책을 누군가 읽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따라서 독자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어떤 스타일의 소설을 쓰겠다는 특별한 비전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기괴하고 엉뚱한 상상들을 붓 가는 대로 써나갔다.
그렇게 쓴 첫 장편이 운 좋게 세상에 나왔다.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나온 걸까? 독자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것이 늘 궁금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그런 엉뚱한 상상력이 있을 거라고는 나 자신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소설가가 되고 보니,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소설가가 되었으니, 결국 소설가는 아무나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로부터 20여년 뒤에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했으니 역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소설이 출간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소설 ‘고래’의 그 엉뚱한 상상들은 모두 내 어린 시절의 판타지라는 것을. 오래전, 낯선 세계와 마주했던 천둥벌거숭이 사내애의 은밀한 기억과 공포, 절망과 매혹은 그렇게 고스란히 한 편의 소설로 남게 되었다.
천명관 소설가·영화감독
■그리고 다음 책들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첫 번째 단편집이다. 데뷔작을 포함해 초기에 쓴 단편이 여덟 편 실려 있는데 마치 여덟 명의 다른 작가가 쓴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는 똑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게 어쩐지 재미가 없었다. 그것이 그저 무의미한 시도였는지,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파격이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해프닝으로 끝난 느낌이지만 지금은 그 제멋대로의 상상력이 그립다.
문학동네(2007)
고령화 가족
두 번째 장편이다. 첫 장편 ‘고래’ 때문에 사람들은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이 소설은 그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왜냐하면 ‘고령화 가족’은 24평 연립주택에서 일어나는 한없이 소소하고 ‘찌질’한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작가로서 그런 반전이 즐거웠다.
문학동네(2010)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2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우상이었던 이소룡에 대한 추억과 그처럼 영웅이 되고 싶었던 충무로의 한 삼류 액션 배우의 이야기이다. 오래전이지만 일 년간 매일 회사원처럼 카페에 출근해 썼는데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위즈덤하우스(2012)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원래 삼류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이 또한 인천 변두리의 건달들 이야기이다. 제임스 브라운의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이 세상은 남자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실은 그들이 얼마나 지질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말하는 역설이 담긴 제목이다.
예담(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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