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진흙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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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옹기장이도 아니고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도 아니지만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
마주 앉아 깍지 낀 연인의 보드라운 손처럼 흙과 내 피부가 닿을 때의 그 뭉클한 촉감.
오래된 한옥에 살다보니 흙으로 손봐야 할 곳이 자주 생기는데 그때마다 난 신바람이 나서 흙장난을 즐긴다.
그러니까 지금도 촉촉한 진흙을 만질 때마다 자연스레 엄마의 입술과 젖가슴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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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옹기장이도 아니고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도 아니지만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 마주 앉아 깍지 낀 연인의 보드라운 손처럼 흙과 내 피부가 닿을 때의 그 뭉클한 촉감. 오래된 한옥에 살다보니 흙으로 손봐야 할 곳이 자주 생기는데 그때마다 난 신바람이 나서 흙장난을 즐긴다.
올해 농사일은 콩 타작을 끝으로 다 마친 뒤라 지난여름 장마에 허물어진 돌담을 쌓기로 했다. 마침 일머리가 있는 귀농한 후배가 돕겠다고 나서기에 든든한 맘으로 작업할 날을 기다렸다.
그동안 돌담 쌓기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했다. 가까운 황토벽돌공장에서 진흙을 주문해 실어 오고, 이웃집 논에 깔린 마른 볏짚도 몇단 얻어다 두었다. 돌은 허물어진 담의 돌을 이용하면 충분할 것 같아 더이상 모으지는 않았다.
작업을 하기로 한 날 아침. 우리는 먼저 집 바깥에 있던 진흙을 손수레로 실어 오고, 진흙을 물로 갤 때 넣을 볏짚을 작두로 썰어 물에 담가놓고, 허물어진 돌담의 돌들을 골라낸 후 밑돌을 놓을 땅을 삽으로 팠다. 쌀쌀한 날씨지만 기초작업을 하는 동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모처럼 땀을 흘리니 기분도 한껏 고양됐다.
우리는 작업할 준비를 마친 후 옆지기가 내온 따끈한 생강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다 말고 후배가 입을 열었다.
“형은 흙 만지는 걸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 사실 나는 어설픈 농부지만 세상의 어떤 감각 재료보다 촉감을 충족시켜주는 진흙이 좋다네.”
아주 오래된 촉감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내 볼을 스치던 엄마의 따스한 입술, 젖을 먹을 때마다 고사리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했던 엄마의 젖가슴. 그러니까 지금도 촉촉한 진흙을 만질 때마다 자연스레 엄마의 입술과 젖가슴이 떠오르곤 한다. 후배는 내 얘기를 공감한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흙 놀이를 할 시간. 볏짚과 물을 부어 개어놓은 진흙을 내가 럭비공처럼 뭉쳐 던지면 후배는 그것을 받아 돌과 돌 사이에 밀어넣고 담을 쌓아나갔다. 돌과 진흙은 멀리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연인처럼 찰지게 잘 달라붙었다.
일을 마치고 대충 손을 씻고 나서 쉬고 있는데 옆지기가 김치부침개와 곡차를 내왔다. 곡차를 나눠 마시다가 문득 나는 최근에 읽은 진흙과 관련된 소설 한 대목이 생각나 입을 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소설에 보면 말이야. 인간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신의 찬연한 빛을 품고 있기에 ‘진흙 등불’이란 말이 나오더라고.” “멋진 표현이네요.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건 경전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진흙 등불!’이라… 인간은 하찮은 티끌이면서 동시에 신처럼 존엄하다는 것이겠죠!”
아침부터 진흙을 주무르며 돌담을 쌓고 그것도 모자라 흙을 화두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밤이 이슥해졌다. 취흥에 젖어 돌아가는 후배를 당산목이 있는 동구 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밤하늘에 뜬 얼레달이 어두운 길을 밝혀주었다.
고진하 시인·야생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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