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들의 말이 곧 소설… 나는 ‘딴짓’의 힘을 믿는다
2023년 제54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정영선(60)은 “동인의 소설과 동인문학상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이 수상은 저에게 기쁨 이상의 부담도 준다. 시상식만 끝나면 이 큰 상의 수상을 잊고 ‘아무것도 아닌 빛’을 썼던 부산 끝에 있는 작고 낡은 아파트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을 생각을 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수상작인 장편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강 출판사)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견뎌낸 노인들의 회상을 통해, 삶이 지닌 희미한 빛을 기록한 작품이다. 해방과 6·25 시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30여 년 장기수로 복역한 ‘안재석’과 해방기 빨치산 활동을 지원하며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와 결혼한 ‘조향자’가 서사의 중심에 있다. 한 개인의 삶이면서 한국인의 지난 세월이 응축된 그 모습이 빛으로 다가와, 독자의 가슴에 스며든다.
정영선은 199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소설집 1권과 장편소설 6권 등을 냈다. 요산김정한문학상 등을 받았으나, 부산 지역 외에서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대 역사교육과를 졸업, 부산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며 40여 년째 살고 있다. 2015년 소설에 매진하고자 교직을 그만뒀다. 그는 “주변에 수상 소식을 알리니, ‘부산 문단의 경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서울과의 거리가 벽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문학의 중심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의 수상이 그 거리를 좁히고 지역문학의 한 부분을 드러낸 듯해서 더 기쁘다.”
-왜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삼았나.
“가끔 우리 사회와 제 의식 속에 식민과 분단이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있을까 생각한다. 오사카에 디아스포라 기행을 갔고, ‘원폭 피해자 구술 기록’에도 지원했다. 어떤 분들은 짧은 시간에 불쑥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원폭 피해’와 같은 말이 아니라, ‘아들도 딸도 이상하게 아프다’거나 ‘결혼 못 했다’고 말이다. 일본 조선학교에선 조선적을 지녀 오랜 시간 한국 땅을 밟지 못한 분들이 ‘이렇게 분단이 오래갈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휴전선이 분단이 아니라, 그것이 개인의 삶에 스며든 분단이구나 생각했다. 소설을 쓰기 위한 경험들은 아니었는데 소설 속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빛’은 어떤 의미인가.
“저는 역사 선생을 오래 해 왔으니, 역사가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봐 왔다.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돈이나 권력은 없지만, 그 사람들 마음에는 변하지 않는 순정이 있다. 저 밑바닥에서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 ‘우리가 이렇게 해서 되겠나?’란 한마디가 모여서 빛이 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오지 않았나.”
-문학은 당신의 삶을 바꾸었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엔 말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문학의 언어는 다른 어떤 매체들과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모두가 다 쓰는 언어와는 다른, 남겨지지 않은 부분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는 것 외의 세상을 상상하게 해주는 건 문학뿐이다.”
-책상을 벗어난 경험의 힘을 믿는가.
“수도권 외의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보다 책을 낸 후가 더 힘들다. 내자마자 독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소개해야 하는데 저는 그 시간에 ‘딴짓’을 해 왔다. 여러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지원금 하나도 안 받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봐 왔다. 소설가로서 지원금과 원고료를 무시하기 어려울 때 그들을 보며 놀랐다. 그런 분들이 없으면 우리 사회가 너무 초라해진다. 제 소설도 그런 귀퉁이 하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정 이유] “왜 내 마음을 몰라줘?” 원망 달래주는 손길
우리는 자주 말한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 상대방이 야속하고 현실이 원망스러운 분들은 물론,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 또한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을 읽어보길 바란다. 세상이 가혹할 때 원망은 원망의 원인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민주화가 성큼 진전된 오늘날에도 소통은 냉담과 오해와 시비와 분노를 증폭시키기만 한다.
이 소설은 사람들 마음과 사회적 현실의 차이를 치밀하게 대조하면서 그 어긋남이 야기하는 신체적 고난을 절실히 느끼게 하고, 그 정신적 고뇌를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여기에 해결책은 없다. 소설은 독자를 고통의 심연으로 끈질기게 물고 들어갈 뿐이다. 그러나 작품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종이 위의 사건이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여기에 공감이 있다. 이 공감이 이해와 연대와 극복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빛”이지만 ‘빛’이다. 이 빛은, 심리적 리얼리즘과 물리적 리얼리즘을 양극재로 충돌시켜 지핀 소중한 화해의 불의 씨앗이다. 한국 문학은 이제 두 차원의 리얼리즘을 갖게 되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
[선정 과정] 4차 투표서 과반수 득표선정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지난해 12월부터 매달 독회를 거쳐 본심 후보작 19편을 골랐다. 심사위원회는 이 중에서 최종심 후보로 구자명 ‘건달바 지대평’, 손보미 ‘사랑의 꿈’,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 일지’, 천운영 ‘반에 반의 반’을 확정했다.
지난달 28~29일 제주도에서 최종심을 열고 무기명 투표로 수상작을 결정했다. 심사위원 각자 한 편씩 써 내어 과반수 득표작을 뽑되, 과반수가 없을 경우 최다 득표 작품을 제외한 채 결선 투표를 하기로 했다. 1차 투표에선 한 작품이 최다 득표인 두 표를 받아, 이를 제외하고 한 표씩 받은 세 작품을 2차 투표에 올렸다. 이들 세 작품에서 2차, 3차 투표를 거쳐 선정된 작품이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한 작품과 맞붙었다. 4차 투표에서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이 과반수로 수상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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