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뒷걸음질치는 방파제, 금융위
“여당이 파도처럼 밀어붙이는데, 공무원이 무슨 재주로 막겠어요.”
요즘 금융 당국 관계자들에게 ‘주식 공매도 정책이 왜 180도 바뀌었느냐’고 물어보면, 몇 번 추궁 끝에 들을 수 있는 볼멘소리다. 정부 당국자들은 원래 ‘증시 선진국이 되려면 공매도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공매도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고 정반대로 말을 바꿨다. 실제 공매도는 지난 6일부터 전면 금지됐다.
공매도란 주식을 우선 빌려서 팔고 나중에 사서 갚는 투자 방식이다. 주가가 내려야 수익을 낸다. 주로 기관과 외국인이 공매도를 하기 때문에, 다수 개미 투자자는 “공매도 세력이 주가를 끌어내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매도가 주가조작을 예방한다는 학계의 옹호론도 만만찮다. 대다수 선진국은 공매도를 허용한다.
이번에 정부가 공매도를 금지한 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개미들 표가 급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권 핵심이 압박했다는 것이다. 명분은 “불법 공매도가 만연해서”라지만, 불법 공매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유력설은 금융 당국엔 유력한 변명거리가 된다. 힘센 정권의 수뇌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이라, 힘없는 금융 당국이 계속 반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금융업계 사람이 반대 사례를 들었다. 지난 2012년 ‘카드 수수료 책정’을 두고 금융 당국이 보였던 모습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당시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일제히 카드 수수료율을 내리겠다고 공약하는 상황이었다. 수수료율을 시장(市場)이 아닌 정부가 정하는 내용의 법률안이 올라왔다.
당시 김석동 금융위원장의 반대는 강경했다. 그는 국회에 나가 “정부가 직접 가격(수수료율)을 정하고 금융사들이 강제로 준수해야 된다면 이것은 시장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헌법에 정면 배치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들이 그대로 의결하려고 하자 ”정부가 가격을 정하는 사례는 어떤 법률에도 없다”고 재차 경고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다.
이후 국내 카드사들은 수수료율을 사실상 강제로 낮추고 있다. 이는 카드사가 본업인 가맹점 수수료가 아닌 카드론 등에 집중하는 왜곡된 구조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때 금융 당국은 뭐 했느냐”는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온다. 할 말을 끝까지 했기 때문이다.
지금 금융 당국은 공매도에 대해 할 말을 끝까지 했나.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3월 “공매도 금지 조치는 국제 기준에서 볼 때 맞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여권의 공매도 금지 요구가 거세지자, 7개월 뒤인 지난달 국정감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흐레 뒤인 지난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직접 ‘공매도 전면 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넘실거리는 정치의 파도를 관료가 모두 막아낼 순 없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파도에 휩쓸려 태도가 바뀌면 곤란하다. 파도가 높다고 방파제가 뒷걸음질할까. 깨질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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