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금 날릴 위험, KB만 4조6천억...‘홍콩 ELS’ 폭탄 터지나
“완전 비상입니다. 주 단위, 월 단위로 고객들에게 시황 문자 발송하고요, VIP분들에게는 지점장들이 직접 전화도 돌리고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한테 찾아가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홍콩 주가 좀 올려달라고요.”
홍콩 H지수 연계 ELS(주가연계증권) 가입자들이 하루하루 초조한 심정으로 주가 그래프를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투자자들 못지않게 피 마르는 이들이 있다. 국내 최대 은행인 KB국민은행을 비롯한 주요 시중은행들이다. 홍콩 H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한 ELS 판매 잔액은 현재 약 20조원. 이 중 약 16조원어치가 은행을 통해 팔려 나갔다. 이들 중 절반가량인 8조3000억원어치가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데, 손실 영향권에 진입한 물량이 약 4조7000억원(56%)에 달한다. 대부분이 KB국민은행에서 팔려 나간 것이다.
◇내년이 두려운 은행들
23일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이하 8월 말 기준)에 따르면, 은행을 통해 판매된 홍콩 H지수 연계 ELS 중 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 물량은 KB국민은행이 4조7447억원으로 은행권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신한은행(1조3329억원), 하나은행(7380억원), 농협은행(7330억원), SC제일은행(6187억원) 등 다른 은행보다 월등하게 많다.
KB가 유독 이렇게 많은 물량을 판 데는 역설적인 배경이 있다. 지난 2019년, 우리·하나은행의 독일 국채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1000억원대 손실 사태를 겪은 뒤 금융 당국은 은행별로 고위험 파생 상품 판매 한도를 설정했다. “앞으로는 2019년 11월 말 신탁 잔액 계정을 초과하는 고위험 파생 상품을 팔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당시 KB국민은행이 신탁 잔액 18조200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신한 9조9000억원, 하나 9조7000억원, 우리 7조8000억원, NH농협 4조8000억원 순서였다. 신탁 잔액이 많았던 KB에 ELS 같은 고위험 파생 상품 판매 물량이 가장 많이 허락된 것이다.
우리·하나은행이 DLF 불완전 판매로 집중포화를 맞았고, 이후 신한과 하나 등이 라임·옵티머스 같은 사모 펀드 사태에 처했지만, KB만은 이를 피해 갔다. 그러나 불과 3~4년 만에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KB에 ‘녹인형’ ELS 몰려
단지 판매 규모가 큰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KB국민은행만 유독 ‘녹인형 ELS’를 집중적으로 팔아 손실이 집중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내년 상반기 만기를 맞는 H지수 연계 ELS 중 KB에서 판매된 것은 98% 손실을 볼 수 있는 녹인(Knock-in·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한 상태다.
녹인형 ELS는 기초 자산(H지수) 가격이 일정 수준 이하(통상 가입 당시 가격의 50%)로 떨어지는 순간, 최초 약정한 이자를 지급하는 계약은 사라지고 기초 자산 가격 하락 폭만큼 손실 가능성이 생긴다. 상품 성격이 예금에서 주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통상 3년인 계약 기간 중 녹인 구간에 한 번이라도 진입할 경우, 만기 시점의 기초 자산 가격이 가입 당시보다 30~35% 넘게 떨어지면 손실이 발생한다. 홍콩 H지수는 2021년 고점인 1만2000선에서 현재 6000포인트 초반으로 정확히 반 토막이 난 상황. 내년 상반기 중 지금보다 주가가 최소 30%는 올라줘야 손실을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KB국민과 달리 다른 은행들은 대체로 녹인이 없는 ‘노(no)녹인형’을 많이 팔았다. 노녹인형은 계약 기간에 주가가 얼마 떨어지든 상관없이, 만기 때 주가 하락 폭이 상품마다 다르지만 50~65% 정도보다 작으면 원금과 이자를 모두 회수할 수 있다. 위험이 적은 만큼 이자율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DLF 사태 이후 파생 상품 위험 문제가 불거지면서 노녹인형이 시장의 대세가 됐다.
업계 관계자는 “주가변동이 크지 않은 때라면 6개월마다 조기 상환이 돌아오고 금리도 더 높은 녹인형 ELS를 소비자들이 6개월 만기 고금리 예금 상품처럼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KB국민은행 측은 “2021년 당시 H지수에 대한 전망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큰 하락만 없다면 녹인형의 이익 발생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었다”고 설명했다.
감독 당국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DLF 사태 이후 금융소비자보호법이 강화됐고, 금융사가 원칙을 지켜 팔았다면 손실도 기본적으로는 고객의 몫”이라면서 “다만 손실 발생 후 소비자 민원이 제기된다면 사안별로 불완전 판매 여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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