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신의 길, 노예의 길
외국 콘텐츠(영화, 드라마)를 보거나 한국 제작물의 영어 자막을 동시에 시청할 때 번역의 질에 따라 그 감동의 크기가 다른 경험이 모두들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은 대형 멀티플렉스용 콘텐츠보다는 다양한 모티브를 가진 OTT 서비스를 시청하는 빈도가 높아져 더욱 그렇다.
필자의 후배가 경영하는 글로벌 번역(70여개 언어) 회사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설립돼 국내 유수의 투자자들이 미래 가치와 비전을 낙관해 주변의 부러움을 한껏 누렸다. 유튜브,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같은 메가 플랫폼 전성시대에 콘텐츠 번역물의 물량도 증가하고 K-콘텐츠의 글로벌 유통이 폭증해 호황과 급성장을 거듭하게 됐다.
그러나 돌연 산업의 미래 방향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시장 상황 변수가 출현해 새로운 비즈니스 도약 모델의 구상이 절실한 단계에 접어들게 됐다고 한다. 바로 챗GPT를 시작으로 구글의 바드 등 실시간 번역과 자료 비교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우리의 피부에 맞닥뜨리게 된 현실이다. 웬만한 전문서적도 초벌 번역의 완성도가 예전에 비해 엄청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에 흔히 정보기술(IT)업계에서 언급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넘어선 수준의 컨텍스트를 전문가가 감수만 잘하면 한 권의 책이 뚝딱 번역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참으로 상전벽해다. 그뿐인가! 비틀스의 미완성 발표곡이 인공지능(AI) 기술로 존 레넌의 목소리를 복원해 공개되고 AI CNN을 표방하며 2024년 개국을 준비 중인 채널1(Channel 1)이 파일럿 뉴스 프로그램을 공개하는 세상이 됐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해 이와 유사한 격세지감적 변화는 이미 알파고와 이세돌, 커제의 바둑 대결에서 본격적인 서막이 올랐다고 본다. 인간의 뇌가 감당하기에 딥러닝에 의한 알고리즘 데이터 앞에서는 기술적인 수준으로만 보면 인간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또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판단 하나가 당사자의 생살여탈을 결정짓는 경우는 어떠한가.
내년부터 프로야구에서 재밌는 시도가 전 세계 최초로 한국 KBO리그에서 시행된다. 바로 경기의 구심이 맡는 볼과 스트라이크의 판정을 인공지능이 맡아 본다. 사실 야구는 투수에 대한 의존도가 워낙 큰 운동이라 구심의 존재가 타자와 팀에 가하는 압박은 저승사자와 같을 것이다. 기계적인 볼 판정과 아울러 경기 전체의 운영을 관장하는 심판진의 경기 흐름에 대한 조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이런 판단, 판결, 판정이 중요한 영역이라면 아마 우리의 사법체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 능력의 유한성으로 인해 형평성과 법리의 해석 적용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간혹 갈등적 시비가 일어나는 판사의 결정이 보도될 때마다 하루빨리 인공지능 판사를 기용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머지않은 장래에는 로봇 판사가 법정을 지키고 있을 날이 선연하다. 잘못된 판결을 나와 똑같은 인간에게서 받는 것보다 뭔가 지능적 측면에서 월등하고 정실이나 이권 싸움에 엮여 있지 않은 로봇이 더 공정하다고 수긍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 스티븐 호킹 등 세계적인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인공지능 고도화에 대한 인류의 암울한 전망 또한 유념해 보자. 머지않은 장래 SF영화의 단골 소재인 인류와 인공지능 간의 전쟁, 아이언맨의 자비스 같은 로봇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다. 인간의 인공지능 기술 의존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대세의 트렌드가 될지라도 인간을 위한 기술은 무엇인지, 인간이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인문학적 성찰 노력이 인공지능 개발에 투여되는 정성 못지않게 광범위하게 숙고돼야 한다. 실로 인간 스스로 주체적인 신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노예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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