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조화와 균형의 대외전략을 추구하자
대통령은 외유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16개월 동안 13차례 해외 순방을 다녀왔다고 한다. 거의 매달 한 번꼴로 해외 순방을 한 것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대통령 임기 후반부에서야 해외 순방의 횟수가 늘어났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국가급의 지도자라기보다는 국내 정파적인 지도자에 머물렀다.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도는 크게 낮았고, 국가 장래를 위한 비전과 철학은 미흡했다. 그나마 임기 초반부에는 위세로 권위를 세울 수는 있었겠지만,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크게 확대되었다. 국내정치에 지치고, 권위는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해외 순방은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음직하다. 국제정세에 밝지 못했던 그들이지만,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재발견하고, 극진한 대접에 감동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높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임기 중반을 넘지 않는 상황에서 이처럼 빈번한 해외 순방도 예외적일 것이다. 글로벌 중추국가 구상을 표방한 윤석열 정부로서는 비정상적인 일이 아닐 수 있다. 윤 정부는 과거 한반도와 동북아에 머물렀던 우리의 외교 지평을 범지구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출범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전제를 그 어느 정부보다 강하게 자부하고 있다. 윤 정부는 새로운 비전의 대표적인 성과로 2030년 부산 세계박람회 개최를 성사시키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대통령을 포함한 대한민국 외교, 경제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며 뛰고 있다.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중추국가 구상이나 윤 정부의 외교적 역량에 대한 타격은 불가피하다. 이런 측면에서 윤 대통령의 빈번한 외유는 아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세계박람회 개최의 가장 큰 경쟁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이다. 윤석열 정부는 포석부터 쉽지 않은 게임을 택했다.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근간으로 글로벌 중추국가 구상을 실현한다는 복안을 제시했다. 북한과의 관계에 집중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안티테제 성격을 띤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에서 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적 낙관론에 신념을 가지고 가치외교를 표방하였다. 새로이 형성될 공급망 구조가 가치에 기반한 세력 간의 구조로 재편될 것이며, 이 체계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인식도 담고 있었다.
2022년 발간한 ‘A World Divided’라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국가는 러시아, 중국, 미국 순이다. 이는 우리의 일반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윤 정부의 가치중심 외교는 러시아와 충돌하고, 중국과는 비우호적인 관계를 불러왔다. APEC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불발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 중국과의 갈등을 전제한 외교 포석은 세계박람회 유치경쟁에서 중·러가 사우디를 지지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포석부터 골리앗과 다윗의 경쟁을 선택한 것이다. 최근 중동 전쟁의 여파로 기회의 공간이 좀 더 창출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윤 정부는 현재 온 국력을 쏟아 막바지 기적의 역전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어려운 경쟁을 수행하고 있다.
세계 박람회 개최를 위한 대결은 민주주의인 대한민국과 권위주의인 사우디 간의 대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중 전략경쟁의 완화와 개선 움직임 등은 세계가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상정한 것처럼 이분법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누가 정의이고 누가 불의인지 구분도 어렵고, 또한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속(俗)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을 포함한 세계는 정의와 가치를 가리는 성(聖)의 세계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민생에 외교·안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안보 위기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같은 전통적인 안보 위기도 있지만, 더 시급한 안보 위협은 글로벌 공급망 단절, 불황의 늪, 시장 불안정이라는 3각 파도에서 온다. 이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전통적인 안보 역량을 확대할 기회와 역량도 소멸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왕휘 아주대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안보 대 경제, 이념 대 이익, 미국 대 중국에서 전자에 대한 지나친 편향성을 극복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를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이념과 가치의 과잉화를 경계하고 기업의 수익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미국의 AFK 오르간스키 교수는 국력을 단순히 GDP나 외양적인 수량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정치비용을 고려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아무리 생산성과 생산력이 높다고 해도, 국내가 분열되고 역량이 결집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국력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현저히 낮을 것이다. 국력은 정책 경쟁력, 지도자의 자질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여기에 국제 정치비용도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파당화나 불필요한 국가 간 갈등을 초래하여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은 지정학적 중간국가이자, 세력 사이에 낀 국가이고, 통상국가인 한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난 18일 플라자 프로젝트(사) 창립 총회에서 현오석 전 부총리가 한국에 긴히 필요하다고 지적한 ‘새로운 혁신’ ‘경제 안보의 중시’ ‘균형성의 회복’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략, 접근방식을 요구한다.
부산 박람회 유치경쟁이 지나가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후 국정의 성공을 위해 차분히 객관적으로 기존의 정책방식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가치의 균형보다는 이익의 균형을 가져오는 전략 재조정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현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의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면서도 더욱 신중하고 겸허히, 실용적인 대외 전략과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이후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이러한 방안들이 정의를 추구하고, 확신한 바를 사심 없이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는 윤 대통령의 성정에는 비록 탐탁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책임지고 있는 윤 대통령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과감한 변신이다.
김흥규 아주대 교수·미중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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