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논란…대통령의 한마디가 입시생태계를 교란하다

한겨레 2023. 11. 23. 19: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 16일 오전 청주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박경미 | 민주당 교육특위 위원장·전 청와대 대변인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다음날 대다수 언론의 기사 제목은 ‘킬러문항은 없었지만’으로 시작했다. 교육부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수험생의 반응은 달랐다. 단답형 문항에서 정답률이 1등급 4%의 절반인 2% 이하면 초고난이도로 보는데, 수학영역 22번 문제의 예상 정답률은 1%대다. 정답률로 보나 체감 난이도로 보나 킬러문항인데,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처럼 교육부는 킬러문항이 아니라고 한다.

교육부가 정의한 킬러문항은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으로 사교육에서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히고 반복적으로 훈련한 학생들에게 유리한 문항’이다. 참으로 모호한 기준이다. 지문이 어렵다고 비판받아온 국어의 경우 지문은 쉽게, 대신 선택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킬러문항을 배제하겠다”는 교육부 예고에 수험생은 평이한 수능을 예상했지만, 실제는 ‘불수능’으로 판명되자 교육부는 킬러문항이 없었다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특기인 갈라치기가 등장해 높은 난이도와 낮은 정답률 문항이 작년까지는 ‘사악한 킬러’였지만 올해는 ‘착한 변별력’으로 둔갑했다.

대통령이 촉발한 킬러문항 논란은 중국의 ‘제사해’(除四害)를 연상시킨다. 제사해는 인민에게 해로운 쥐, 모기, 파리, 참새 등 네 가지를 제거하자는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이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을 보고 “저 새는 해로운 새”라고 하자, 참새 잡기 운동을 벌였고 수억 마리를 죽였다.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급증하고 곡물 생산량이 급락하면서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참새를 제거했을 때 발생한 자연 생태계 파괴와 킬러문항을 제거했을 때 일어난 입시 생태계 교란은 비슷한 면이 있다. 수능이 치열한 대입 경쟁에 학생들을 줄 세우는 악역을 담당하는 가운데, 킬러문항은 최상위권 변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등장했다. 수험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킬러문항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킬러문항을 만들어 낸 필요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수능 개선책을 전문가 논의에 기반해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라 수능 5개월 전 터져 나온 대통령 한 마디에 킬러문항 제거가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 건 비정상이다. 교육부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들어 올해는 문항 검토진 외에 추가로 공정수능출제점검위원회를 구성해 킬러문항을 잡아내도록 했다. 그런데 검토진과 중복 역할을 하는 점검위원회에 대해 출제진 내부에서도 무용론이 나온다.

지난달 발표해서 연말까지 확정할 대입 개편안 문제도 심각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입 수시와 정시 비율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시끌벅적한 공론화를 거쳤고 신랄한 비판에 직면했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는 이슈가 이슈를 덮는 상황 속에 대입 개편안이 주목받지 못하고 지난 20일 공청회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대입 개편안을 보면, 내신에 상대평가 등급을 병기하게 되는데,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요체인 고교학점제와 부정합적이다. 고교학점제는 ‘공급자 중심의 획일적 교육과정’에서 ‘수요자 중심의 선택형 교육과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으로, 학생의 진로에 부합하는 과목 선택이 핵심이다. 그런데 상대평가 등급을 병기하게 되면 유불리에 따라 과목 선택의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한다면서 이를 무력화시키는 내신 제도를 내놓는 건,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격이다.

킬러문항뿐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도 대통령의 한 마디에서 사달이 나기 시작했다. 미래를 담보하는 교육정책과 연구개발 예산은 발을 잘못 내디디면 그 후과가 수십 년간 계속된다. 최근 역대급 세수 부족에도 주식양도세, 상속세 완화로 부자감세를 또 한다는데, 이런 패착은 정권이 바뀐 뒤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어긋난 교육정책과 연구개발 예산이 야기하는 폐해는 궤도를 수정해도 복원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대통령의 괜한 훈수가 가져올 대가가 너무 크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