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세 칼럼] 일회성 상생금융보다 맞춤형 채무조정을
경기침체와 고금리 지속으로 빛에 허덕이는 국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있다. 우리경제가 얼마나 빚부담에 가위눌려 있는지는 통계수치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지난 9월말 우리나라 가계부채 규모는 1900조원에 육박하며 1인당 국민소득 대비 100%를 넘어 세계 최고수준이다. 국민 한 사람 당 갚아야 할 가계부채 규모도 3700만원으로 미국의 1500만원보다 훨씬 많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가계부채 증가속도가 스노우볼처럼 가속도가 붙고 증가 요인이 구조적이라는 데 있다. 최근 발표된 국제금융협회(IIF)의 글로벌 부채보고서에서도 한국의 가계와 기업부채가 규모와 증가속도, 건전성 면에서 우려할 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적시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으로 불가피한 증가요인도 있었지만 지난 정부 5년간 다른 선진국에 비해 부채 증가속도와 규모가 남달리 컸던 원인은 부동산정책 실패로 인한 집값 상승과 전월세값 상승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이밖에 저금리 상황에서 가상화폐 시장이나 주식시장 등에 몰려든 '빚투현상'도 가계빛 증가 원인으로 거론된다.
이처럼 부채규모만으로도 우리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유례없는 고금리 지속은 우리경제와 민생 곳곳에 충격과 고통을 주고 있다. 우선 지금과 같은 고금리와 과도한 부채로 인해 소비가 살아나기 어렵고 자영업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도산이 증가할 경우 경기침체로 저성장기조가 지속될 수 있다.
또한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빚을 못 갚아 신용불량자나 파산자가 늘어나고 이 과정에서 제도금융권을 이용하지 못한 사금융 피해자가 급증할 수 있다. 9월말 현재 3개 이상 금융회사에 빚을 지고 있는 다중채무자만 50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바 이들이 지금과 같은 고금리 환경에서 얼마나 버틸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올해 6월말기준으로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수는 약 78 만명이고 금융회사 빚을 못갚아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람도 7만명에 육박하고 있어 갈수록 그 수는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고금리 환경 하에 금융회사들의 연체율이 급증하고 부동산PF 부실과 부실채권도 급증하고 있어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될 수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고금리정책을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므로 우리나라도 당분간 고금리정책 기조가 불가피하다. 고금리 상황이 당분간 지속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금융취약계층을 방치할 경우 신용불량자 양산을 넘어 자칫 금융위기 발발의 도화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금융취약계층을 대상으로한 선제적인 맞춤형 채무조정지원방안이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은이 과도한 가계부채 규모를 고려해 미국과 달리 기준금리를 계속 인상하지 않고 상당기간 동결해왔다. 이로 인해 한미간 기준금리차가 2%포인트나 벌어지는 이례적인 역전현상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한은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대출금리는 기준금리 인상폭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으로 인상되어 가계와 자영업자의 이자부담이 급증한 반면 은행의 이자이익은 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대통령의 은행산업의 독과점과 갑질 지적에 따라 금융당국에서도 여러 차례 은행에 대출금리 인하경쟁 유도와 서민금융지원 확대를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은행들은 적당한 성의 표시에 그치면서 서민들의 은행 문턱은 오히려 높아져 서민들이 금리가 높은 비은행권이나 사금융시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반면에 은행 임직원들은 대출금리 인상으로 늘어난 이자이익으로 높은 임금에다 성과급까지 누림에 따라 최근에는 대통령까지 나서 "소상공인들이 은행 종노릇 한다"는 강도높은 비판을 하면서 은행이 공공의 적으로 내몰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과 은행의 상생금융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한술 더 떠 은행의 초과이자이익의 일정비율을 상생금융 기여금으로 부과하는 일종의 횡재세 도입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절대 다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인 만큼 마음만 먹으면 통과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입장에서도 거부권행사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쉽지않은 결정이 될것이다. 은행산업이 정부의 인허가와 감독을 받는 산업이고, 이자이익의 원천이 기술혁신보다 통화당국의 금리정책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횡재세 성격의 기여금 부과에 찬성하는 국민여론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는 우리나라에서 민간 영리기업에 과도한 이익이 발생했다고 횡재세를 부과하는것은 헌법정신에 비쳐 바람직하지 않고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특히, 은행 지분의 과반수 이상을 외국인들이 보유하는 상황에서 자칫 급격한 자본유출과 대외신인도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초과이익을 내부에 적립해 자본충실을 유도하지 않고 세금으로 흡수할 경우 대규모 적자가 나서 은행 건전성이 위협받을 경우 외환위기 당시처럼 은행이 대규모 감원을 하거나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자본건전성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의 과도한 이자이익은 현행 누진세율 구조로 되어있는 법인세로 흡수하고 대신 은행이 지금과 같은 고금리 환경 하에서 고객과 상생하는 방안을 모색토록 유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전처럼 정치권과 정부의 엄포에 눌려 은행들이 보여주기식 일회성의 이자나 수수료 감면에 그치는 상생방안은 곤란하다. 고금리 환경에 버티기 어려운 금융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채무조정 지원 계획을 금융당국이 제출받아 지원 규모나 실효성을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햇살론 등 서민금융상품에 대한 출현을 통해 더 이상 은행대출이 어려운 저신용자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은행 입장에서도 무차별적인 이자 인하보다는 향후 이자 상환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금융취약계층에 대한 맞춤형 지원이 은행의 건전성 확보에 도움이 되고 금융양극화 완화에도 기여하는 서로 윈윈하는 진정한 상생방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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