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7. 이천 경기도자미술관
기대 이상이다. 도자예술의 세계가 이처럼 넓고 재미있고 풍성하다니! 이천 설봉산 자락에 안긴 ‘경기도자미술관’에서 만난 도자 작품은 상상력의 최첨단에 서 있다. 2022년 하반기부터 1년 넘게 새롭게 단장해 11월24일 재개관하며 선보이는 첫 소장품 상설전의 이름이 ‘현대도예-오디세이’다. “가장 큰 변화는 소장품 상설전이 마련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도자엑스포 준비 때문에 자주 문을 닫아야 했거든요. 그럼에도 전시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오디세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 천의 얼굴을 가진 도자
2001년 3월 개관한 이천세계도자센터는 2021년 3월 ‘경기도자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꾼다. 20년이나 사용하던 이름을 바꾼 까닭은 현대도자미술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미술관의 환경도 확 바꿨다.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디지털 전시 콘텐츠 제작과 콘텐츠 고도화에 공을 들였다. 경기도자미술관이 소장한 2천466점의 작품은 한국현대도예와 세계현대도예의 역사에서 중요한 거장의 작품을 비롯해 동시대 현대도자예술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 중에서 선별해 상설전을 준비한 것이다. 따라서 작품을 감상할 때 과거나 전통이 아니라 현대와 변화에 시선을 맞춰야 한다.
경기도자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현대도자미술의 놀라운 성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도자가 아니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도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오묘한 매력을 선사한다. 흙으로 빚는 도자는 회화나 조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과정, 불의 단련을 거쳐야 완성된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김지수 큐레이터의 해설을 통해 도자의 변신이 이미 오래전에 이뤄졌음을 확인한다. “1950년대 전근대적 도자 수공업에서 벗어나 예술로서 도자가 등장합니다. 수공예적 도자에 대한 관습적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대미술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표현 매체’인 예술로서 인식의 전환을 맞으며 등장한 것이지요.”
■ 통념을 벗겨주는 현대도예-오디세이
‘현대도예-오디세이’는 도자에 대한 통념을 시원하게 벗겨준다. 예술로서 도자를 정립한 20세기 현대도예의 시작과 오늘날 현대도예의 다양한 표현 양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3부로 꾸며졌다. 1부의 주제는 ‘흙, 현대 도예의 서막’이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전쟁의 폐허 위에 한국 도자의 1세대 작가들이 설립한 ‘한국조형문화연구소’, ‘한국미술품연구소’, ‘한국공예시범소’가 한국 도자의 변화를 끌어낸 주역이다. 경영난으로 연구소는 곧 문을 닫지만, 참여 작가들은 조선 도자의 전통을 간직한 이천에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이천은 도자의 성지로 거듭난다. 3대를 잇는 작가들의 작품은 전통의 힘을 보여준다. ‘벗어나고 싶은 심정’은 얼핏 청년 작가의 작품처럼 파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90대의 원로작가 정담순이 2000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사각의 닫힌 벽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인물의 모습에서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작가의 열망이 느껴진다.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의 대학에서도 도예 교육이 시작된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정규, 권순형, 김익영, 원대정 같은 1세대 작가들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작가들을 길러낸다. 전통의 흐름을 계승한 일본과 달리 단절되다시피 한 전통을 새롭게 복구한 이들의 노력은 지금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 옆에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배치해 시선을 집중시킨다. ‘점토혁명’을 통해 현대 도예의 세계를 확장한 미국 작가의 작품이다. 전통이 짧기 때문일까, 이들은 더욱 과감하다. 흙덩어리를 던지고 부수는 파격적인 모험을 감행한다. 왜 가죽옷을 벽에 걸어놓았을까? 도자로 부드러운 가죽의 질감까지 살려낼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솜씨에 놀란다. 전통에서 과감히 벗어나 흙이 갖는 물질에 집중한 작품들은 도자예술의 미래를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역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과 확연히 구별된다. 소품들이지만, 현대 도예의 선두에 일본의 작가들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미일 3국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통해 현대 도예가 어떻게 생겨나 변모해 왔는지를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부 ‘흙, 물질과 조형 언어’는 21세기 현대 도예의 다양한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국제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깨지는 도자의 특징을 이용해 만든 홍콩의 작가 유엔 소링의 ‘무제’는 도자예술의 첨단을 보여주는 듯하다. 노르웨이 토르비욘 크바스뵈의 2014년 작 ‘튜브 조형물’도 묘한 매력을 풍긴다. 창자처럼 잘린 튜브를 겹겹이 쌓았는데, 흙을 빚어 이지러지지 않고 형태를 그대로 살려낸 작가의 솜씨가 경이롭다. 흙의 성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흙을 반죽해 본 적이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작품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3부 ‘흙, 현대 도예의 모색과 탐구’에서 더욱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상의를 벗은 할머니가 베개를 쥐어뜯어 사방에 깃털이 어지럽게 흩어진 침실의 풍경이 펼쳐진다. 미국 작가 팁 톨랜드가 2017년에 제작한 작품 ‘짜증’은 도자의 표현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솜씨에 거듭 경탄한다. 벨기에 작가 안 반 호이의 ‘기하학에 대한 탐구’란 작품은 흙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점토를 종이처럼 얇게 펼친다. 잠시만 발을 멈추고 작품을 응시하면 내 안의 고정관념, 상식과 통념이라는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상설전을 본 후 기획전시를 볼 수 있도록 관람 동선을 도자기 속처럼 나선형으로 구성했다. 현대도자미술을 재미있게 감상하려면 상설전을 반드시 관람해야 한다. 상설전은 현대도자미술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오솔길이다.
■ 흙이 빚어내는 놀라운 세계
미술관 앞에 세워진 ‘도자문화선언문’을 읽어본다. 2001년 8월 ‘세계도자엑스포2001경기도’를 개최하며 세계도자엑스포조직위원회가 작성한 것이다. “산업기술은 인류에게 많은 것을 주고 또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흙과 인간의 손으로 빚는 도자의 기술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편하고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내는 데 기여해 왔다.”
도자는 인류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 자연과 문명을 융합하여 지구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생명권을 보존하면서 전통기술과 미래의 첨단기술을 이어 단절을 지속의 역사로 바꾸어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기도자미술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국제교류다. 2001년 개관 이래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교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2019년까지는 해외 진출과 세계도예의 국내 유입을 위해 추진됐다면, 2020년 이후는 미술관의 역할과 정체성 확립에 집중하여 세계 속 한국현대도예의 지평을 넓히고 담론을 형성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들의 기획과 참여로 이뤄지는 ‘토락교실 교육프로그램’은 도자예술과 음악 미술 체육 등 다채로운 분야를 접목한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도자미술관이 자리 잡은 설봉공원 주변에는 이천시립박물관과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이 있어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공원을 산책하며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이천에 여행을 떠날 때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하겠다.
경기도자미술관은 변신 중이다. 미술관의 콘텐츠와 일부 시설을 보완한 2024년 4월 초에 공식적인 재개관이 이뤄질 전망이다. 그날이 기다려지지만, 지금의 상설전만으로도 현대 도자미술의 멋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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