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이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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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의 인터뷰예요. 오늘 촬영은 어땠어요?
어쩌다 보니 오랫동안 화보 촬영이나 인터뷰를 안했어요. 한창 하던 때 제안받았더라면 고민 없이 하겠다고 했을 텐데 오랜만에 하려니 선뜻 응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다 제가 이제 나이도 어느 정도 들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매거진 화보 촬영 및 인터뷰라고 하니 좀 더 의미 있는 12월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스튜디오에 왔어요.
보통 어떤 일을 할지, 거절할지 결정할 때 기준점으로 삼는 지점이 있나요?
한 4년 전부터 기준이 생겼어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뭔가 딱 하나는 제 마음에 들어야 해요. 가령 친한 사람들과 하는 일이면 아무리 고되거나 돈이 되지 않는 일이어도 해요. 하나라도 설레는 지점이 있어야 하죠. 또 일을 하고 난 뒤에도 좋은 기분이 유지되는, 제게 활력을 주는 일들을 주로 하게되요. 예전에는 스스로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10년간의 무명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제안받는 건 뭐든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일단 뭐든지 많이 해보라고 말해요. 저 역시 그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 같은 기준점이 생긴 거니까요. 20대에는 그렇게 활동하는 게 맞았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스케줄 때문에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다음 스케줄을 서둘러 갔어요. 젊으니까 그걸 다 견뎠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이곳저곳 아프면서 한꺼번에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더라고요. 곧 마흔이 되니 이제는 건강하게 일하려 고 해요. 가능하면, 저를 설레게 하는 일들을 하면서요.
그러고 보면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어요. 의도한 휴식이었나요?
사실 완전히 쉬지는 않았어요. 공백기처럼 보이긴 했지만 제 직업이 대중에게 많이, 그리고 자주 드러나야 존재감이 생겨서인지 4년 가까이 예능 프로그램 <코미디빅리그>(이하 <코빅>)만 할 때는 공백기처럼 느껴지신 것 같아요. 하지만 <코빅>을 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대신 <코빅>만 하던 때는 제 유튜브 채널인 <이국주> 콘텐츠를 열심히 만들었어요. 콘텐츠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모두 혼자 다 했죠. 지금은 친한 동생과 같이 작업하지만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혼자 밤을 새워서 편집했어요. <이국주>에는 굉장히 편하게 혼자 밥 먹고 망가지기도 하는 모습을 담아요. 그런데 누가 대신 촬영해주면 어색해질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혼자 시작하게 됐어요. 사람을 들이는 일도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누군가에게 지시해야 하는 상황이 좀 불편한 것 같아 잠을 조금 자더라도 혼자 하게 됐죠. 지금은 너무 좋은 친구를 만나 함께 잘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이제는 사람을 들이는 일이 좀 더 편해진 걸 수도 있겠어요.
나이가 들수록 성격도 둥글둥글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말 모든 게 긴장되고 예민했어요. 저 자체는 예민하지만 맡는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보니 털털한 척해야 할 때도 있고 텐션이 낮은 날에도 애써서 업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때도 있어 더 예민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이제는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과거의 저는 ‘독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예전에는 개그 방식이 거침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면 동료가 거의 없었어요. 다른 업계의 분들과 예능 프로그램을 해야 하니까 제가 좀 더 공격해야 웃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러다 보니 좀 더 거침없이 말했어요. 그런 것들이 비호감의 요소가 되기도 했고요. 그러다 지금은 어느 프로그램에 가든 동료가 많아졌어요. 자연스레 저도 편해졌죠. 굳이 제가 늘 공격수가 될 필요가 없어졌고 수비수가 되다 보니까 자연스레 독한 모습이 좀 없어졌어요.
개그맨은 활동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찰 프로그램일 수도 있고, 극을 짜야 하는 무대가 될 수도 있고, ‘먹는 것’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도 있고요. 장르별로 선택해 나가는 과정이 어렵진 않나요?
후배들에게 쉴 때면 무엇이든지 배워놓으라고 해요. 운동을 잘한다면 테니스든지, 골프든지 배워놓는 거예요.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으니 준비를 하는 거죠. 제가 거의 1세대 유튜버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어느 날은 이렇게 먹기만 하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테니스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이하 <전참시>)에 나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매니저와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죠. 그냥 저는 제 앞에 있는 것들을 해왔고, 그러다 보니 그 타이밍에 적절한 기회가 왔어요.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에 골프 레슨을 받고 밥도 먹고 강아지도 유치원에 보내고 스튜디오에 온 거예요. 뚱뚱하지만 부지런하죠.(웃음)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다음 활동을 위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업이에요.
조회 수나 구독자 수 같은 것을 목표로 영상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재미있는 건 조회 수가 많이 나오지 않는 영상도 어떤 식으로든지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일종의 제 포트폴리오가 돼요. PD님이 “지난번 유튜브에서 만들었던 거 방송에서도 할 수 있어요?”라고 제안할 때도 있고요. 한번은 후배 양배추(조세호)랑 콘텐츠 촬영을 했는데 조회 수는 많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참시> PD님이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며 함께 출연해보자고 했죠.
그냥 저는 제 앞에 있는 것들을 해왔고, 그러다 보니 그 타이밍에 적절한 기회가 왔어요.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에 골프 레슨을 받고 밥도 먹고 강아지도 유치원에 보내고
스튜디오에 온 거예요. 뚱뚱하지만 부지런하죠.(웃음)
그런 식으로 콘텐츠에 동료들이 함께할 때가 있어요. 모두와 친할 수는 없지만 함께 코너를 같이했거나 성실한 후배들을 보면 챙겨주고 싶어요. <코빅>도 사라지고 개그맨을 위한 무대가 점점 좁아지고 있어 좀 더 챙기고 싶기도 하고요. 저 역시 선배나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타인을 웃기는 직업을 가졌지만 자신을 즐겁게 하는 건 무엇인지 궁금해요.
저를 가장 즐겁게 하는 건 제가 가진 모든 취미이고 저를 가장 웃기는 건 개그맨들이에요. <코빅>이 없어지고 가장 아쉬운 건 무대를 준비하던 회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개그맨은 한 명만 있어도 웃긴데 그 많은 개그맨이 한자리에 모이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개그맨을 웃음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데뷔한 지 16년이 됐어요. 그 시간이 늘 한결 같진 않았을 텐데요, 그럼에도 계속 희극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요?
이 일을 가장 잘하는 것 같아요. 처음 개그맨이 됐을 때 5년만 하더라도 오래 버티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막상 5년이 지났는데 제가 딱히 보여준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 버티다 보니 <코빅> 무대에 오르게 됐죠. 처음에는 매번 꼴찌를 했지만 어느 날은 2등도 하다 보니 아직 개그감이 남았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최근에는 곧 마흔을 앞두고서도 <코빅> 마지막까지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은 코너를 했어요. 개그 무대를 계속 짤 수 있겠다 싶었죠.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받으면 제가 웃길 수 없거나 못 살릴 것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코빅>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그로 인해 잘 버텼던 것 같아요.
오랜 커리어의 변곡점이 됐던 때가 있을까요?
2014년, 2015년에는 정말 많이 바빴어요. 그런데 그 뒤로 4년 정도 정말 너무 힘들었죠. 크고 작은 일이 일주일에 하나씩 터졌거든요. 그 시간 동안 일을 조금씩 줄이면서 정리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코빅>만 하게 된 거예요. 즐거운 일만 하면서 지내며 주변 정리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했더니 이제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20분 정도 걸리는 수술을 받았는데 눈을 뜨자마자 제가 계속 울고 있는 거예요. 심각한 병이 아니었지만 자꾸 몸에 이상이 생기니 저도 모르게 너무 힘들었던 거죠. 아프고 나니까 내가 하겠다고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고 하되 무리해서 하지는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보다 즐거운 일을 찾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돈이 없으면 그냥 집 밖에 안 나가고 지냈죠. 예전에는 돈이 없으면 티 내기 싫었는데, 언젠가부터는 후배들 밥 사줄 돈이 없으면 그냥 집에 불러서 밥 차려줬어요. 일이 주는 스트레스도 없어지고 후배들한테 “너네가 날 끌어줘. 그러다 내 이름 시상식에서 한번 불러주면 좋고” 같은 말도 스스럼없이 했어요.
그런 선배가 이국주에게도 있나요?
변기수 선배가 그런 존재죠. 막 MBC 공채 개그맨이 됐을 때 변기수 선배가 자기보다 한참 높은 선배에게 가서 “국주가 제일 뻔뻔해서 잘될 거예요”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마치 은인 같았어요. 그러다 무명 시절이 끝나고 방송국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데 수상 소감을 말하다 변기수 선배가 딱 생각나는 거예요. 무대 위에서 선배를 바라보며 이 얘기를 하는데, 선배가 쑥스러운지 눈길을 피하더라고요. 보통 예능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재미를 위해 웃긴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는데 말이에요. 시상식이 끝나고 회식 자리에 갔더니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PD님이 “(변)기수가 전화해서는 ‘봤지? 국주가 아까 가장 큰 상을 받았어’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 얘기를 할 때면 항상 눈물이 나요. 전 선배에게 늘 보답하고 싶은데 수상 소감 한마디만으로도 선배가 너무 기뻐했어요. 늘 감사한 선배예요.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받고 사는 방송인에게 늘 좋은 칭찬만 따를순 없겠죠. 부정적인 댓글과 평가를 마주한다는 건 용기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누군가 뚱뚱하다고 놀리면 같이 놀렸어요.(웃음) 개그맨이 되고 나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는 적어도 이런 일로 관두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다 이 일을 시작한 지 10년쯤 됐을 때는 대중으로부터 비호감이란 평을 받았어요. 그땐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또한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보자고 다짐했죠. 이제는 조금이라도 좋게 봐주는 사람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일해요.
커다란 테이블 한가운데 냄비를 두고 바글바글 전골 같은 음식을 끓여 먹고 싶어요.
소주를 곁들이고요. 곱창 전골이면 좋겠네요.
과거에는 소주를 마시면 쓸쓸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소주를 함께 마실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 같아요.
이번 크리스마스나 연말은 그렇게 보내고 싶어요.
부지런한 거요. 유튜브 댓글에도 언제 이렇게 아침 차리고, 메이크업하느냐며 부지런한 것 같다는 얘기가 많아요. 늘 뭔가 사부작사부작 하고 있어요. 캠핑카 살 때도 주변 사람들이 몇 번 안 탈 거라고 했는데 정말 부지런히 다녔어요. 그걸 소재로 콘텐츠 촬영도 하고요. 그랬더니 캠핑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도 하게 되더라고요. 타로를 배우다 자격증도 땄어요. 오늘 화보에 입은 옷도 대부분 제가 그동안 사두었던 거예요. 제 사이즈에 맞는 옷이 한계가 있어 평소에 화보 촬영이나 시상식에 필요할 것 같은 옷들이 있으면 사둬요. 열심히 찾아보고 해외 직구로 사는 것도 많고요. 국내에서는 제 사이즈를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필요했어요. 학생이 될 수도 있고,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클럽에서 잘 노는 사람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인지도가 조금씩 올라가면서 시상식을 위한 옷도 준비 해놨죠.
완전한 맥시멀리스트네요.(웃음) 연관 검색어 중에 ‘이국주 다이소’가 있어요.
맞아요. 다이소에서 20만원어치쯤 샀어요.(웃음) 물건이 넘쳐날 것 같아 후배들을 불러 나눔할 때도 많아요. 옷도 마찬가지고요.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만들고 싶은 음식이 있나요?
예전 같았으면 집에 빨간 커튼을 쳐놓고 초도 켜고 케이크도 준비해 열심히 파티를 했을지도 몰라요. 드레스 코드 맞춰 친구들도 부르고 사진도 많이 찍고요. 그런데 이제는 커다란 테이블 한가운데 냄비를 두고 바글바글 전골 같은 음식을 끓여 먹고 싶어요. 소주를 곁들이고요. 곱창 전골이면 좋겠네요. 과거에는 소주를 마시면 쓸쓸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소주를 함께 마실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 같아요. 이번 크리스마스나 연말은 그렇게 보내고 싶어요.
돌이켜봤을 때 2023년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소개팅! 태어나서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는데 얼마 전 소개팅을 하게 됐어요. 첫 소개팅이어서 엄청 긴장됐지만 그 설렘이 좋았어요. 연애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시간이었거든요. 내년에도 이런 소개팅이 들어오면 좋겠네요.(웃음)
에디터 : 송정은(패션), 박민(인터뷰) | 사진 : Jacob Myers | 스타일리스트 : 하단비 | 헤어 : 권영은 | 메이크업 : 박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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