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시간 순삭시킨 '서울의 봄'의 마력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11. 2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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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쉴 틈 없는 선택의 순간들 그리고 실제 역사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다. 1979년 신군부의 반란 사건이 그것이다. 영화적 각색과 허구가 더해져 있지만, 기성세대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하나회를 주축으로 벌인 반란의 주동자로서 영화가 전두광(황정민)이니 노태건(박해준) 같은 새로운 이름을 입혔어도 관객들은 대부분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실제 역사가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서울의 봄>을 본 관객이라면, 그것도 당시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고 의외로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적이 놀랄 게다. 실제로 2시간 20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의외로 짧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 순삭'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도대체 무슨 마력을 발휘한 걸까.

영화는 우리가 실제 역사적 사실로 이미 인지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의 총격으로 살해된 10.26 사태가 벌어진 후, 지하 벙커에 군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12.12 군사반란의 성공과 그 결과로서 1980년에 있었던 광주 항쟁의 비극을 알리며 끝을 맺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신군부 세력이 삼켜버린 그 정권이 꽤 오래 지속되며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불러 왔는가를.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겨우 두 달도 되지 않은 기간에 벌어진 군사반란이 만든 여파는 그만큼 컸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안타깝게 들여다보면서. 그 아픈 역사를 되돌릴 수 있었던 무수히 많은 기회와 선택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전체 역사의 향방이 바뀔 수 있는 선택의 순간들은 그래서 하나하나가 극적으로 다가온다. 다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관객들이 숨죽이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 역사적 인물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델로한 이태신(정우성)은 그 '다른 선택'을 끝없이 환기시키는 인물이다. 전두광은 권력욕에 불타는 늑대들의 우두머리다. 하나회라는 군 내 사조직에서 자신보다 상급자들인 '선배들'과 하급자들인 '동생들'을 모아 놓고, 하나회를 밀어내려는 눈엣가시 정상호(이성민) 참모총장을 '10.26 사태 조사'라는 명목으로 무력 납치를 모의하는 장면에서,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요설을 뱉어내는 그의 모습은 늑대들의 우두머리 그대로다.

그렇게 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최한규(정동환) 대통령의 재가까지 얻으려하는 이 늑대들의 활활 타오르는 욕망 속에서 이태신은 오롯이 끝까지 군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는 반란군이 납치한 정상호 참모총장을 구출하려는 시도를 하고,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에게 9공수를 보내 보안사를 공격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또 하나회 도희철(최병모) 2공수 여단장의 명령으로 공수부대가 한강다리를 넘으려 하자 이를 온 몸으로 막아 돌려세우기도 한다. 하룻밤에 벌어진 일이지만 이 치열하게 치고받는 대결 속에서 몇몇은 그의 뜻을 따르지만 모든 통신을 감청하며 정보를 장악한 신군부 세력들은 하나회의 모든 연줄까지 다 동원해 이태신을 점점 고립시켜 나간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이태신의 설득과 신군부 세력들의 회유와 협박 사이에서 갈등하다 어떤 선택을 내리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다. 처음 반란 모의를 할 때 전두광의 제안에 회의를 표했던 한영구(안내상) 1군단장과 배송학(염동헌) 군수차관보 또 현치성(전진기) 수도군 단장 같은 전두광의 상급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반란이 터졌을 때 오국상(김의성) 국방장관이 미8군 사령부로 도피하지 않고 이를 조기 진압했다면, 9공수와 3공수를 함께 물리자는 반란군의 꼼수에 동조하지 않았다면....등등.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포착된다.

영화는 이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 12.12 군사반란과 그로 인해 신군부가 들어서고 광주의 비극이 벌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결국 늑대들의 아가리 속으로 '서울의 봄'은 삼켜져 버리지만, 영화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태신에 집중한다. 100여 명의 수도경비사령부 병사들과 함께 반란군 진압에 나설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이 비춰지는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굳이 캐릭터의 이름을 이태신이라고 붙인 것 또한.

이미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이토록 몰입감을 만든 건 그 재구성에 있어서 극적 선택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연결해 놓은 구성의 힘이다. 큰 틀 안에서는 전두광과 이태신이 양측에서 벌이는 치고받는 핑퐁 게임이 전개되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이 대결 속에 저마다의 선택을 강요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만들어낼 끔찍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선택들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건 현재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 역시 그런 작은 선택들의 총합이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서울의 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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