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여자·야한 여자’도 아닌···‘화가 정강자’의 진면목
1995~2010년 그린 작품 40점 선보여
초현실적·이국적·자유로운 화풍이 특징
과거 누드 퍼포먼스 등 여성 주체성 표출
화가 정강자(1942~2017)는 ‘센 여자’이거나 ‘야한 여자’로 대중에게 인식됐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혔다. 2000년대 들어 뒤늦게 한국 실험미술의 최전선에 섰던 정강자의 예술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연구와 평가는 부족한 상태다.
돌이켜 보면 정강자의 예술은 도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한국 최초의 누드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1968)로 남성중심적 시선과 가치관에 도전하고, 작가들이 모래 구덩이에 들어가면 관객들이 한강 물을 퍼붓는 ‘한강변의 타살’(1968)로 기성 미술계를 비판했다. 첫 개인전 ‘무체전’(1970)에선 그림이 없는 관람자 참여 예술을 시도했지만 당국에 의해 강제철거됐다. 그의 예술은 독재 시절의 경직된 한국 사회, 가부장적 사회에 수용되기엔 너무 앞서갔다. 정강자는 1977년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떠났다.
https://www.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1802091819001
한국을 떠났지만 정강자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80년대 귀국 후 생계와 육아를 감당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하며 작고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정강자의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전시는 요란한 소문과 수식어를 떼어낸 ‘화가 정강자’의 진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전이다. 정강자가 남긴 400여점 작품 가운데 1995~2010년 그린 40점을 선보인다.
정강자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축약하기는 힘들다. 제도권 밖에 있었던 정강자는 남미와 아프리카의 대자연, 사하라 사막과 같은 원시의 풍경을 담아내다가, 여성의 주체성과 힘을 한복 치마를 통해 표현하고,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직선과 원의 중간 단계인 반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했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정강자의 화풍은 제도권의 지도와 지원 없이 홀로 만들어간 것이기에 낯선 동시에 자유롭다.
팔이 4개인 여성이 뜨개질로 자아낸 실이 하늘을 덮고 행성을 품는 모습을 그린 ‘뜨개질로 우주를’(1995~1996)에서 여성은 거미로 그려진다. 이는 울창한 열대우림 속에서 실을 뜨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거미’(1995)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여러 개의 손으로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었던 뜨개질을 하는 여성의 모습은 자녀 양육과 화가로서의 야망을 동시에 추구하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정강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강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남미, 아마존, 남태평양 등으로 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이 시기 그린 그림들은 이국적인 자연과 원시의 모습을 통해 환상과 꿈을 표현하고자 했다.
한복 치마를 통해 여성성을 재해석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정강자는 한복 치마를 두고 “수천년을 남성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은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자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 속 치마들은 기둥과 같이 힘차게 솟았다가, 인생길을 상징하는 듯 구불구불한 산길이 되기도 한다.
2000년대부터 정강자는 반원을 작품의 기본 단위로 사용했다. 우주 만물의 최소 단위를 상징하는 원에 인위적 직선을 결합해 만든 반원으로 형태를 채워넣는데, 기하학적 추상으로 나아가는 실험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정강자 그림엔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야누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자유롭게 예술을 펼치고 싶은 모습과, 사회적 제약에 억눌린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현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강자는 끝까지 현실의 중력에 억눌리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에 넣은 작가의 서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옆에 그려진 여성의 나신을 발견할 수 있다. 정강자가 선보인 누드 퍼포먼스는 당시 선정적으로 소비되고 말았지만,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정강자의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순회 중인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에 포함된 작품이자 정강자의 데뷔작 ‘키스 미’(1967)를 연상시키는 ‘달과의 대화’(1997)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회가 그저 보기 좋은 꽃으로 여기더라도, 기어코 입을 열어 발언하고야 마는 ‘꽃’,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정강자의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12월30일까지. 무료.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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