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이제 곧 잠이 들 겁니다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2023. 11.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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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대동맥은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흉부의 대동맥류는 몇 번 시술을 거쳤음에도 커다랗게 부풀었다. 가끔 찌르는 듯한 흉통으로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시한폭탄이 들어 있군요. 한 번만 더 문제가 생기면 방법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고령이었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육체의 운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병원에 들고 갈 수 있도록 할아버지의 대동맥 사진이 든 CD를 식탁 위에 놓고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내준 혈압약을 삼키며 막연한 시간을 살았다.

그날은 언젠가는 찾아온다. 할아버지는 피를 토하며 응급실에 누웠다. 폐의 각혈이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의식은 남아 있었으나 이미 혈압이 낮고 불안정했다. 고령 환자에게 심각한 각혈은 드물다. 할머니가 내민 CD를 열어보고 즉시 상황을 알았다. 끔찍한 대동맥류가 왼쪽 폐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만성이 된 동맥류가 폐와 같이 구멍이 뚫리면 환자는 각혈하게 된다. 저 피는 인간의 가장 커다란 혈관에서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 방법이 없다. 죽음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환자가 하필 내 앞에 온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각혈에 열중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이 병에 대해 알고 계셨죠? 피를 토할 수 있다는 것도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말하는 그의 입가에 혈액이 쏟아졌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숨 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대동맥이 터졌어도 뇌혈류는 유지된다. 하지만 저 정도 실혈을 감당할 수 없다. 엑스레이에서는 출혈이 왼쪽 폐를 뒤덮고 있었다. 환자는 곧 의식을 잃고 떠날 것 같았다. 나는 영상을 노려보며 시간을 벌 수단을 고민했다. 깊게 삽관해 오른쪽 폐에만 튜브를 넣은 뒤 진정제로 호흡을 멈춰 출혈을 잡아보는 것이다. 특별히 제작한 더블 루멘 튜브가 있어야 했다. 운명이 정해져 있더라도 가능한 일을 해야 했다.

“진정제 준비해 주세요.” 나는 소생실 서랍을 맹렬히 뒤졌다. 몇 년간 사용한 적이 없던 튜브라서 직접 찾아야 했다. 돌아가 진정제를 투여하기 전 잠들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원한 잠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그냥, 이제 잠이 들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번에 잠들면 환자는 다시 깨어날 확률이 거의 없었으니까. 문득 할아버지가 있는 쪽이 시끄러웠다. 의식이 떨어지는 듯했다. “가만히 좀 계세요.” 튜브를 찾아오자 환자는 자고 있었다.

“환자 진정제 투여했나요?” 전공의가 대답했다. “의식이 떨어지고 컨트롤이 어려워서 제가 놓으라고 했습니다.”

환자는 의식을 잃었고 약간 편해 보였다. 각혈이 줄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었고 맥이 약했다. 할머니는 그가 운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더 이상 처치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의료진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신히 찾아온 더블 루멘 튜브를 손에 쥔 채 할아버지에게 사망을 선고했다. 우리에겐 패배가 정해져 있었고, 그 정해진 길로 환자는 떠났다. 할머니는 피 묻은 할아버지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사망 진단서를 쓰며 물었다.

“전공의 선생님. 환자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에 들은 말은 ‘그만 좀 움직이세요’였나요?” “아, 그랬을 것 같습니다.” “... 그래요. 수고했어요.”

환자는 어차피 무의 세계로 떠났다. 어떤 말을 들었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수면제를 맞으면 기억이 사라진다. 공들여 재운 환자들을 간신히 깨웠을 때, 내 말을 기억하는 환자는 없었다. 무슨 말을 외쳤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나는 무의미한 일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자위하면서, 그러면, 나의 의학적 선택 또한 욕심에 불과한 것 아니었나. 예견된 패배였지만, 패배는 무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무의미에 항거하는 사람들이다. 그에게 잠이 들 거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나는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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