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프로 거절러’
‘소설 거절술’이라는 책이 있다. 캐나다 편집자가 투고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을 수록했다. 왜 이런 책이 존재하는 것이며, 번역까지 됐을까. 모두 거절을 어려워하는 만큼이나 거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투고 원고를 거절할 때 편집자들은 형식적인 언어로 메일을 보낸다. ‘귀하의 소설은 저희 출판사의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사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 작품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투고 원고에 일일이 맞춤형으로 응답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솔직함이 가져올 예측 불가능한 상황도 부담스럽다. 투고자들은 진실을 감당하기 힘들고 편집자들은 그런 투고자와의 대화를 감당하기 힘들다. 살아 있지만 불편한 말을 주고받는 대신, 죽었지만 편의에 기댄 말을 선택하는 건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역효과가 날 때도 있다. 거절당한 투고자 상당수는 그 메일을 수용하지만 일부는 항의 메일을 보내오기도 한다. 때로는 화난 목소리로, 때로는 절박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출판사의 방향이란 게 뭔지, 내 소설은 왜 안 되는 건지, 구체적인 의견을 들려달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편집자들은 난감해진다.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것 자체가 무능의 방증으로 평가되는 문화에선 책임질 말을 하지 않는 것만이 최선의 대응으로 통한다. 그러니 핵심을 뺀 얘기로 대화는 공회전하고 대화가 끝날 땐 서로 미움과 앙심을 한 줌씩 나눠 가진 상태가 된다.
여기까지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지만 프로는 타인에게 좋은 일을 한다. 타인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존과 실력에 도움이 되는 말, 요컨대 충실한 내용이 있고 세심한 비전이 있는 거절의 말을 할 줄 안다. 솔직함에 정성이 더해질 때 거절은 불편한 말이 아니라 필요한 말이 된다.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 내가 책임지지 않을 말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말을 건넬 수 있을 때 아마추어 편집자는 ‘프로 거절자’로 거듭난다. 이 이치가 비단 편집자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모든 인간관계에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수준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진실과 정성에 기반한 거절술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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