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기억과 기념을 넘어 비전으로 계승해야
독립정신 제대로 전하려면 기념관·학술연구 등 절실
박철규 대한민국지식중심 공동대표
지난 11월 17일은 제84주년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 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각종 기념일이 되면 으레 정치권에서는 메시지를 발표한다. 이날도 “선열들의 피와 땀, 눈물로 만들어 낸 광복 ‘단단한 나라’ 만들 것”, “정치권, 순국선열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책임지지 않는 각자도생 사회, 인간 존엄 보장 못 해”, “민주주의 위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해야” 등의 메시지가 발표됐다.
모처럼 미래지향인 것으로 공감을 얻을 만한 내용이다. 이 메시지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로드맵이나 프로세스를 제시해야 한다. 인내심이 임계점에 달한 시민은 더 이상 ‘말의 성찬’에는 공명도 공감도 하지 않는다. 생업에 전념하면서도 금도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든다. 엄중한 심판에도 위임받은 권한을 권력으로만 간주해서인지, 반성은커녕 조건반사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이들은 지난 대선 전부터 ‘성장과 공정’, ‘공정과 상식’을, 최근에는 ‘원칙과 상식’을 내세우기도 한다. 말로는 구별이 되지 않는데 본인들이 주장하는 ‘공정과 상식’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독선과 오만이다. 망국 당시의 정치 리더십도 이랬을까.
우리가 각종 기념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은 물론,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 비전으로 계승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념일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이 제안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데서 유래됐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기 위해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격렬한 반대투쟁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이한응은 외교권 박탈에 항의, 자결했으며 이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면암 최익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등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고, 1906년에는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일제에 의해 대마도에 유배됐는데, 단식에 돌입하여 음력 1906년 11월 17일 순국했다.
최익현의 영구(靈柩)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수많은 인파가 모이고, 상무사원들은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高忠)’이란 만장과 큰 상여를 준비해 맞이했다. 동래의 기생들도 만장을 지어 통곡했고, 범어사 스님들도 치전(致奠)을 올렸다. 당시 장례 행렬이 주례를 통과할 때에는 호상객이 수천 명으로 늘어났으며, 운구는 각 동리에서 맡았다. 이렇듯 형식은 애도였지만 내용은 시위였다. 오재영도 만장을 들고 구포까지 따라갔다.
1907년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모금에 참여한 70여 명의 학생 중 박재혁 최천택 김영주 백용수라는 이름도 보인다. 이들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의 연루자였으며, 의열단과 연관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들인 이들은 1890년대 생으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로부터 을미사변이나 단발령, 을사늑약 등의 부당성을, 서당의 선생님에게서는 일본의 한국 병탄 등에 대해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부산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이처럼 ‘순국선열의 날’이 가진 함의는 상당하다. 우리가 이 함의를 비전으로 계승을 하려면, 기념관과 기념공원 등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제2도시라고 하는 이곳 부산에 독립기념관조차 없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기념관 등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2020년 8월 ‘부산독립기념공원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올해 8월 공청회를 거쳐 부산시민공원 내 사랑채에 조성한다는 의견이었다.
그간의 곡절은 접어두고,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만들어진다면 누차 지적된 사항이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콘텐츠 생산의 저수지 역할을 하는 학술연구는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히 독립운동과 인물의 선양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계가 드러난다.
순국선열들은 기억, 기념을 넘어 그들이 지킨 이 나라가 외세에 굳건히 맞서는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나라이기를 바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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