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용의 물건漫談]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말 취향이 좋을까?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2023. 11.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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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달리기, 재즈 음악, 싱글 몰트위스키.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소재고 한국에서도 유행했다. 애호가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행켈 손톱깎이까지 찾아 쓴다.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스타일 아이콘’이라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독자적인 스타일 아이콘이라 볼 수 있을까? 그의 세대와 당시 일본을 들여다보면 그리 보기 힘들다. 하루키는 1949년 교토에서 출생해 1968년 도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다. 1968년이면 일본에서 전공투(全共闘) 운동이 치닫던 때다. 하루키는 투쟁에서 물러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도쿄가 아닌 좋은 지방도시의 문학 인텔리, 나는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키워드라고 본다.

그때 일본의 패션잡지업계는 미국의 기류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논픽션 ‘아메토라’는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전한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라 미국 본토의 반전 반문화운동도 활발했다. 자급자족과 자연주의를 중시하며 미 서부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책 ‘홀 어스 카탈로그’도 1969년 나왔다. 일본 잡지 ‘헤이본 펀치’ 편집자 이시카와 지로는 그 책을 나오자마자 입수했다. 그 책에 입각해 캘리포니아풍 반자본 정서에 미제 물건을 곁들이고 일본풍 소비문화를 이식한 잡지가 1976년 창간한 ‘뽀빠이’다. ‘뽀빠이’ 창간 3년 후인 1979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단했다.

영 가디언 인터뷰에서 파네라이 시계를 찬 하루키.

‘뽀빠이’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같은 상징을 공유한다. (당시)현대 미국이다. ‘뽀빠이’ 이전 일본 남성 패션은 미 동부풍 ‘아이비’ 스타일을 제안했다. 흰 셔츠에 남색 재킷을 입는 아이비리그 학생복 차림이다. ‘뽀빠이’ 이후 일본 잡지들은 캘리포니아 정서가 섞인 반문화풍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했다. 달리기를 하고, 테니스화를 신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 같은 생활이다. 하루키와 ‘뽀빠이’의 인연은 실제로도 이어져, 그가 ‘뽀빠이’에 연재한 티셔츠 수필이 ‘무라카미 T’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일본화한 미국풍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밴 재킷(VAN jacket)이 1978년 도산한다. 일본의 전후를 주름잡던 ‘아이비’풍 브랜드다. 이때와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 ‘나의 양복 변천사’가 맞물린다. 하루키가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단 시상식에 입은 정장이 바로 도산한 밴 재킷 정장이다. 그는 아오야마 매장에서 폐업 세일을 하는 밴 재킷 면 정장을 사서 세탁기에 빨고, 구깃한 정장에 낡은 테니스화를 신고 상을 받으러 갔다고 적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특징을 본다. 하루키는 평생 거대 시스템에 대해 삐딱한 태도를 취했지만 시스템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구겨진 할인 양복도 양복이다. 해외를 돌며 집필해도 거점은 일본이다. 한국에서 인기인 ‘하루키 스타일 요소’도 독창적인 게 아니라 그가 직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일본 내 소비문화의 일부다. 사실은 하루키 작품도 그렇다. 매번 조금씩 다를 뿐 자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2014년 영국 신문 가디언 인터뷰 사진 속 무라카미 하루키는 파네라이 시계를 찼다. 파네라이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속공방으로 시작했는데 우연히 유명해져 스위스 회사가 인수해 명품화시킨 브랜드다. 나는 하루키의 파네라이를 보고 면구스러우나 ‘취향은 그저 그러시구나’라고 생각했다. 파네라이를 본 순간 내게 하루키는 세계적인 대문호가 아닌 돈 좀 번 일본 아저씨로 보였다. 파네라이는 특정 국가에서 유독 인기인데 그중 하나가 일본이다. 그 가디언 인터뷰 표제인 “나는 일본 문학의 추방자다”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제도 안에 있으면서 아닌 척’으로 보였다. 내게는 파네라이가 그 물증이었다.

왜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이 국제적으로 인기였을까. 정보 격차 때문이라 본다. 당시 일본은 버블이 절정이었고, 아시아의 타국 젊은이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하는 브랜드나 이름들은 접할 수 없어 이국적인 만큼 더 그럴듯해 보였다. 90년대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련이라 받아들인 당시 20~30대가 X세대와 386으로 불리던 지금의 50대와 60대다. 나는 그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닌 척’이라 느낀다. 지배하면서 혁명가인 척, 부자인데 빈자인 척, 제도 속에서 안전한데 앓는 척. 그것도 하루키의 영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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