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속부터 이순신 머릿속 고뇌까지 시각화… 무대 미술이 진화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며 무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멎는 듯하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연출 이지나)이 공연되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 위에는 전함의 선창 안, 혹은 뼈대를 드러낸 괴수의 배 속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큰 사진>이 버티고 있다. 창작진이 ‘고통의 동굴’이라 부르는 이 공간은 꿈과 환상, 고뇌가 뒤범벅돼 펼쳐지는 충무공 이순신의 머릿속이자, 가여운 민초들이 왜적의 칼에 풀잎처럼 베어져나가는 조선의 땅이고, 신출귀몰한 지략으로 왜선을 수장시키는 한산과 명량, 노량 해전이 벌어지는 바다가 된다.
최근 우리 창작 공연들이 선보이는 무대 미술의 성취는 놀랍다. 단순히 규모가 크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다. 무대는 관객·배우·희곡 다음으로 꼽히던 주변적 지위를 넘어, 이야기와 상호작용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핵심 역할을 맡는다. 휴대전화만 열면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CG)으로 만들어진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지금 우리 공연의 무대는 극장만이 줄 수 있는 비범한 경험의 주역이 되어가고 있다. 라이브 공연이 갖는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무대 미술의 진화다.
‘순신’의 기둥 줄거리는 전란을 예지하고 그에게 거는 백성들의 기대를 버거워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행진에 괴로워하는 이순신의 꿈들이다. 실제 꿈을 중요하게 여기며 점을 치고 앞일을 예측하려 했던 충무공의 난중일기 기록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서울예술단 무용수 형남희 단원이 연기하는 이 충무공은 대사 대신 춤으로 자신의 내면과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전쟁터를 오가며 배우들과 함께 뛰고 구르고 찢기고 넘어진다. 입체적으로 디자인된 구조물은 무대 뒤편 중앙의 소실점을 향해 관객의 공간 개념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9개의 프로젝터로 비추는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 영상과 조명의 조화가 점프하듯 건너뛰는 시간의 흐름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작창을 맡은 전방위 예술가 이자람이 직접 무인(巫人)으로 무대에 서 우리 소리로 충무공의 마음과 전쟁의 양상까지 풀어낸다. 여기에 우리 뮤지컬을 대표하는 음악감독 김문정의 노래들까지, 자칫 이질적으로 느껴지거나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극적 요소들을 하나로 엮어내며 중심을 잡는 것이 오필영 디자이너가 창조한 무대다. ‘순신’은 이 무대가 아니라면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됐다. 공연은 26일까지.
연극 ‘튜링 머신’이 공연 중인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의 무대 역시 관객을 튜링의 머리속으로 안내한다. 앨런 튜링(1912~1954)은 컴퓨터의 조상과 같은 계산 기계를 발명해 독일군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연합군의 2차 세계대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과학자. 기계가 생각할 수 있게 될 미래를 내다보고 인공지능을 감별하는 ‘튜링 테스트’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뒤엔 이 활동 자체가 기밀로 분류돼 보상 대신 감시를 당했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고난을 겪다 요절했다. 원작 연극은 프랑스 공연계 최고상인 몰리에르상 수상작. 한국 공연에선 LG아트센터 중극장 U+스테이지의 높은 천장을 활용한 우주선처럼 거대한 무대 장치와 조명·영상 디자인으로 앨런 튜링의 미묘한 심리 변화와 비극의 전말, 에니그마 해독 과정을 형상화한다.
무대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창립할 때 로고의 모티브가 됐던 튜링이 한입 베어문 사과부터, 체스판과 사진 등 튜링의 일생을 설명하는 소품들이 배치돼 그의 추억과 고뇌의 시간들을 오가는 장치가 된다. 튜링은 계산 기계를 처음 사랑을 느꼈던 소년의 이름을 따 크리스토퍼라 부른다. 이 무대 장치를 활용해 영상으로 비춘 숫자와 알파벳이 엇갈리는 암호의 트랙 위를 고상호 배우가 연기하는 앨런 튜링이 투사처럼 내달린다. 무대가 갖는 시공간 제약을 뛰어넘는 기발한 창의성과 상상력이다. 공연은 25일까지.
무대 미술은 때로 극장의 제한된 공간을 SF 판타지 영화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기술로 관객의 오감을 지배하는 마법이다. 제7회 뮤지컬어워즈 무대미술상을 받은 뮤지컬 ‘데스노트’의 무대가 대표적. 경사진 바닥과 벽면 천장까지 3면에 LED 패널 1380장을 설치하고 레이저 프로젝터로 명암을 조종해 관객은 마치 영화관 스크린이나 TV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단차를 둬 오르내리도록 만들어진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무대 역시 아이디어의 힘으로 명성 높은 원작 영화가 주는 부담과 제약을 극복한 경우다. 평평해지면 바닷가가 되었다가 경사지게 만들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되고, 중간만 솟아오르면 자매들이 알콩달콩 일상을 보내는 툇마루가 있는 집으로 변하는 이 무대는 입체적 음향과 조명 디자인을 도구로 관객을 바닷마을로 안내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차요금 내려다’...D기어에 내린 50대 여성, 주차 차단기에 끼여 숨져
- ‘4년 만에 이혼’ 김민재, 예상 재산분할 80억?...양육비도 어마어마
- ‘나는 작은 새’ 조혜정 전 GS 감독 별세… 올림픽 배구 동메달·최초 여성 감독
- 박지원 “김주애는 후계자 아냐... 유학 중인 아들 있을 것”
- 술 마시고 중앙선 넘어 추월하려다 사고 낸 20대 운전자
- “이런 지구, 아이들에게 못 물려줘”… 배우 박진희, 한인경제인 앞 호소
- 정유경 총괄사장, ㈜신세계 회장 승진... “백화점·이마트 계열분리”
- ‘우울증 갤러리’서 만난 10대 졸피뎀 먹인 뒤 성폭행 20대
- South Koreans now subject to China’s anti-espionage law
- Editorial: Global spy games target Koreans abroad—can South Korea resp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