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들의 해체… 최초의 ‘세계전쟁’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 15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청나라에서 벌어졌던 태평천국내전(1850~1864)보다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 그 영향은 더 세계적이었다. 세계의 여러 제국이 해체되고 독립국들이 늘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어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여러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아프리카에서 칭다오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렀던 독일 제국도 해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체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이 독립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핀란드, 폴란드, 그리고 우크라이나 등이 독립했다. 제국 질서를 급속히 국제 질서로 변화시킨 “최초의 세계전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될 줄 몰랐던 이 전쟁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들이 “모든 평화를 끝낸 평화”처럼 되면서 많은 분쟁의 원인들을 남겨 놓았다. 일본 제국의 지배를 묵인한 한반도도 그중 하나였다.
한반도와 비슷했던 발칸반도
전쟁의 불씨는 발칸반도에서 튀었다. 발칸반도는 제국적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다른 제국들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와 비슷했다. 발칸반도를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1821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독립 전쟁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리스 무명용사 기념비의 근위병들이 입고 있는 푸스타넬라의 400개 주름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400년을 상징한다. 청 제국으로부터 한반도가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독립문의 상징성과 유사하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밀려난 공간을 놓고 독일 제국과 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과 연대한 세르비아가 격돌했다. 세르비아 민족통일주의자들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이후 황위 계승 예정자가 된 황제의 조카였다. 그는 헝가리에 이어서 다른 민족들까지 끌어들인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꿈꾸었다. 암살은 국제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칭다오(靑島)에서의 세계전쟁
발칸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배후에는 독일의 세계 정책이 있었다.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늦게 식민 제국이 된 독일은 선발 제국들의 패권에 도전했다. 독일은 3국 간섭으로 청나라를 도운 대가로 칭다오를 차지했다.
1914년 영일동맹에 따라 참전한 일본은 칭다오를 노렸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베를린을 러시아에 빼앗길지언정 칭다오를 일본에 빼앗기지 말라고 했다.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독일군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독일 유학을 다녀와 일본군을 독일식으로 개조했었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영국 유학파 이노우에 가오루(조선의 개화 독립파를 지원했던)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참전을 독려했다.
약 2만5000명의 일본군과 영국군이 수상기모함(水上機母艦)까지 동원하여 독일군, 오스트리아-헝가리군,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현지 노동자들이 지키던 칭다오를 공격했다. 프랑스는 해군을 지원했다. 쌍방 약 1000 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12명이 전사했다.
독일이 세운 맥주 공장으로 유명한 칭다오에서 일본은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약 4700명의 포로는 1920년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그들 중 약 170명은 일본에 남았다.
참전하지 못한 코리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인된 코리아 전사자는 없었다. 1910년 이후 대한제국 황실은 독립 투쟁의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근대 문물에 현혹되고 압도당하는 사이 일본은 “땅을 차지한 농부는 먼저 돌들을 솎아 내기 마련”이라며 105인의 지도급 인사를 미리 구속했다. 간신히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은 1913년 하와이에서 105인 사건을 고발하는 ‘한국교회핍박’을 출간했다. 만주로 간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은 위안스카이의 허가를 받아 만주에 무관 양성소를 세웠다.
대한인들은 빌헬름 2세를 “세계 제일의 위인”이라고 보고 희망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 일본군이 독일군을 격퇴하고 칭다오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연대하겠다는 기대는 몽상이 되었다. 러시아 내의 동포 신문 ‘권업신문’도 적국 독일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러시아에 의해 발행이 금지되었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1918년 11월 세계 전쟁이 정지되고, 이듬해 1월 18일 파리평화회의가 시작되었다. 평화회의 의장을 맡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는 컸다. 언더우드에게 영어를 배운 김규식이 파리로 파견되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대한인국민회는 윌슨이 총장을 지낸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대표로 뽑았다. 그러나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믿었던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도 불발되자 2월 초부터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의지를 표방하는 코리아 대행진을 준비했다.(4월 14일 개최)
1919년 3월 김규식이 파리에서 분투하던 중에 한반도에서는 3·1만세운동으로 독립 의지가 표출되었다. 한 달 후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9월 블라디보스트크에서 이동휘가 이끌던 대한국민의회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맡았다. 그러나 일본이 5대 전승국의 일원으로 버티고 있던 파리평화회의에서 참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리는 없었다.
임시정부 통합에 앞장섰던 안창호는 1920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신년 축하회에서 “독립 전쟁이 공상이 아니요, 사실이 되려면 대한 이천만 남녀가 다 군인이 되어야”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체코 부대가 프라하로 떠나면서 매도한 무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은 25세 연하의 이범석(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임명)을 다음과 같이 치하했다. “이제 나도 세계를 향해 힘차게 자랑할 밑천이 생겼소.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할 수 있게 된 것이오.”
프랑스 조계에 세워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현재 상하이에 있는 유적지에 가면 중국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19년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중화민국(현재 대만)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에는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세워졌다. 일본은 프랑스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막기 위해 협상했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지렛대로 활용했다.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프랑스 외교관에게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외교부는 “국가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이 국가 정체성”이라고 훈령했다. 망명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 기초한 헌법 정신에 부합된다고 본 것이다. 프랑스가 현재까지 평양 정권과 수교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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