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김성수 “전두광·노태건 이름 바꾼 이유요? 마음껏 하기 위해”[인터뷰]
“우리가 읽는 역사는 역사가가 여러 역사의 조각을 짜맞춰 기술한 것이잖아요. 마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읽히죠. 그런데 저는 역사가 그렇게 흐른다는 데 회의감이 있어요. 거창하게 쓰여진 어떤 역사는 그 순간 개입한 많은 이들의 돌발적인 생각과 가치관, 됨됨이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김성수 감독)
김성수 감독에게 12·12 군사반란 사건도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뒤엎은 그날 밤은 그저 권력에 눈먼 인간들의 욕망이 만든 결과라고 그는 봤다. 김 감독의 신작 <서울의 봄>(22일 개봉)은 꿈틀거리는 검은 욕망이 서울 시내를 휘감은 9시간을 그린 영화다. 영화 개봉을 닷새 앞둔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의 손에 <서울의 봄> 시나리오가 처음 들어온 것은 4년 전이다.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였지만, 그에겐 다소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적으로 역사 기록을 잘 압축한 느낌이었어요. 재현에는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12·12를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도 이미 있고요.”
연출을 거절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김 감독을 놓아주지 않았다. 거절을 하고도 수개월이 지나도록 이 이야기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특이한 경험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거절해놓고 왜 이러지?’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라고 반문했어요. 그러다 어렴풋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됐고 10개월이 지났을 때 하겠다고 했죠.”
사실 그는 12·12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사건 당일 육군참모총장의 한남공 공관에서 들려온 총성에 몸을 떤 주민 중 하나가 김 감독이다. “어떤 때는 자랑하듯, 어떤 때는 흥분한 상태로 ‘내가 그날 한남동에서 직접 총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시나리오가 저한테 온 거예요. ‘어라, 이게 나한테 왔네?’ 했죠. 운명적이었어요.”
다만 김 감독은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먼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바꿨다. 실존인물들의 이름을 한두 글자씩 고쳐썼다. 전두환은 전두광, 노태우는 노태건이 됐다. 그 나름의 ‘거리 두기’였다. 스토리텔러로서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 감독은 “12·12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모습, 판단하고 결정하고 또 따라가는 그 과정들을 다루고 싶었다”며 “기록에 드러나 있지 않은, 인간 군상들이 보여준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다. 제 마음껏 하기 위해 이름도 바꿨다”고 설명했다.
영화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 가장 관심이 쏠린 것은 배우와 실존인물 간 외적 ‘싱크로율’이다. 특히 황정민이 대머리 분장을 한 것은 큰 화제가 됐다. 닮은 데가 없는데도 ‘진짜 전두환 같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김 감독에게 황정민은 ‘믿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정민씨와 <아수라>를 같이하면서 ‘이 사람은 불덩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탐욕의 화신, 굶주린 늑대무리의 왕인 전두광을 표현하려면 무조건 정민씨여야 했어요. 정민씨가 ‘악의 끝판왕을 보여주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믿었습니다. 실제 인물과의 싱크로율과는 무관한 선택이었어요. 극 안에서 형상화시킨 인물로 관객에게 납득이 되면 되니까요.”
다만 헤어 스타일 만큼은 신경썼다. 모든 일의 시작인 인물의 특징적인 부분은 살리고 싶었다. 전두광의 대머리, 넙적하고 살짝 들린 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서울의 봄>이 그의 전작과 구별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수시로 공수가 역전되는 등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이 적극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자막에 거부감이 있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제가 옛날 사람이잖아요. 영화가 주는 실재감을 방해하는 요소라는 선입관이 있었죠. 그런데 제작 과정에서 젊은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어려워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니 이 싸움은 아군과 적군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등장인물은 많은데 피아를 구별해야 하고, 9시간 동안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시시각각 변화를 전달해야 하는데 자막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김 감독에게 선명한 그날 밤의 기억은 이제 44년 전의 일이 됐다. 이해를 돕는 자막이 필요할 만큼 현재 젊은 세대에게는 아득한 역사 속 사건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영화의 목표가 ‘현재성’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금의 시대 상황과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재성이란 ‘이런 일은 늘 벌어진다’는 거예요. 이런 놈들이 악마고 못됐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역사가 다 아는데요. 다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언제든 어떤 커다란 일이 벌어질 수 있고 그것이 역사책에 나오듯 멋진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을 거쳐 나오는 게 아니란 거예요. <서울의 봄>이 이 시대에 가진 의미라면 그것이라 봅니다.”
<서울의 봄>은 개봉일인 이날 52%의 예매율(오후 3시 기준)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올 한 해 대작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며 ‘위기론’까지 나온 한국 영화계에 구원투수가 될지 주목된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11121835001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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