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지키면 뭐하나”… 위태로웠던 9.19 군사합의 5년 [뉴스+]
무력사용 중지 등…1년 만에 위반한 北
南이 먼저 합의 중단은 처음 “경고 의미“
정부가 22일 북한 군사정찰위성 3차 발사에 대응해 ‘9·19 남북 군사합의’ 중 대북 정찰 능력 제한 조항에 관한 효력을 정지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군사분계선(MDL) 일대 북한 도발 징후에 대한 공중 감시·정찰활동을 복원하기로 했다. 일부 효력 정지이나 사실상 군사합의 파기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된다. 2018년 9월 19일 체결된 남북 군사합의는 그간 북한의 수차례 합의 위반으로 위태로웠다. 군사합의를 지키느라 한국군 대비태세가 취약해졌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8년은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던 해였다. 문 전 대통령은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양측 정상이 손잡고 판문점 남측과 북측 경계선을 오간 모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남았다. 문 전 대통령은 한 달 만인 5월 26일 예고 없이 다시 방북해 통일각에서 두 번째 회담을 했다. 이어 9월 18일 평양에 초대돼 3차 회담을 가졌다. 이때 나온 것이 9·19 군사합의다.
합의문에는 △어떤 경우에도 무력사용 않기 △상대방 관할구역 침입·공격·점령 행위 않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상대방 겨냥한 각종 군사연습 중지 △우발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시 연락체계 가동△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등 내용이 담겼다.
이 합의는 당시 무력 충돌을 방지해 한반도 평화에 큰 진전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권 치적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합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이 1년여 만에 합의를 위반하기 시작한 탓이다.
북한은 2019년 11월 북한 창린도 일대에서 해안포 사격을 했다. 창린도는 9·19 군사합의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기로 합의한 해상완충수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날 사격은 북한이 9·19 군사합의를 위반한 첫 사례다.
합참이 군 통신선을 통해 북한 측에 재발 방지 및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전통문을 보냈지만, 북한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대외선전 매체를 통해 “남한이 북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북의 오발사격 또는 단순 실수로 판단했지만, 유엔군사령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분석해 이견을 보였다.
북한은 한 달 뒤인 6월 16일 남측에 ‘관계 단절’을 통보하며 남북공동 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남북공동 연락사무소는 문재인 정부가 1차 남북회담 후 ‘판문점 선언’에 따라 건설비용, 유지비, 사용료 등 총 235억원가량을 들여 북한 개성시에 세운 것이었다. 9·19 군사합의에서도 남북은 긴밀하게 소통하고 협력하기로 했다.
북한의 연락사무소 폭파는 판문점 선언과 9·19 군사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것이었다.
북한은 이후에도 노골적으로 합의 위반 행위를 지속했다. 지난해 10월엔 해안완충구역 내에서 수차례 포병 사격을 했고, 11월엔 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지난해 12월엔 북한 소형 무인기가 내려와 서울 북부와 인천시 강화 일대를 순찰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은 국내 군사합의 파기 여론에 힘을 실었다.
올해 1월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9월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22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개최된 임시 국무회의에서 9·19 군사합의 효력의 일부를 정지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9·19 군사합의 일부 효력 정지안’을 현지에서 전자결재로 재가했다.
9·19 남북 군사합의 일부 효력 정지는 남측이 먼저 남북 합의 이행 중단을 선언한 첫 사례다.
통일부에 따르면 1971년 남북 당국 간 최초로 체결된 ‘적십자 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관한 합의서’ 이후 현재까지 문서로 채택된 남북 합의는 총 258건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합의만 해놓고 이행되지 않는 등 이미 사문화됐거나 북측의 일방적 파기에도 남측만 계속 이행하고 있다. 예컨대 1992년 채택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며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한국만 계속 지키고 있다.
현재까지 북한은 남북 합의에 대해 6회 이상 ‘폐기’나 ‘백지화’ 등을 공식 선언했다. 2009년 1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성명을 통해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 무효화’를 선언했고, 2013년 3월엔 조평통이 ‘남북 간 불가침 합의’ 전면폐기 성명을 냈다.
고재홍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통일전략연구센터장은 지난해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슈브리프에서 “북한의 합의파기 선언은 이미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한 위협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한국 정부의 대북제재 혹은 대응조치에 대한 대응수단의 하나로 활용하는 패턴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정부 내에선 9·19 군사합의를 효력정지 절차 없이 사문화로 간주해 군사 태세를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정부가 효력정지에 나선 것은 우리만 일방적으로 준수하는 합의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단호한 대북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을 만나 “북한에 의해 야기되는 심각한 안보 위협 상황에서 법 조항(남북관계발전법 23조 2항)에 근거해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번에 9·19 군사합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하면서 그 기간을 ‘남북 간 상호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로 정했다. 이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관계발전법 23조 2항은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거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기간을 정해 남북 합의서의 효력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지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성윤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장은 “기간을 정해 효력을 정지한다는 것은 북한의 행동이나 남북관계 상황에 따라 합의를 되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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